티스토리 뷰


휴직 기간이 끝나갈 때쯤, 나는 우울했다. 그 긴 시간동안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아서.

집안 정리도 하고, 아티클도 몇 개 쓰고, 뭔가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남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없어서.

게다가 몸은 아파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컨디션은 난조. 엉엉. 이런 게 어디있어, 내 휴직 물려줘- 이런 심정으로 매일 우울했다.

그런데, 핸폰 사진 정리를 간만에 하고 보니, 지난 늦여름부터의 시간들이 되짚어진다.

매일 아이 등원 시키고, 강의하러 서울에 왔다갔다 하고, 어린이집 각종 일들 쫓아다니고, 연구 면담도 다니고.

흐아, 나 열심히 살았구나, 이제야 알겠다. 매일매일 정해진 일들, 재미있겠다 생각했던 일들을 꾸준히 열심히 하며 살았구나.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이제야 읽는다. 어제와 오늘에 걸쳐 머리말을 읽어냈다.

(문장 하나하나가 뼈에 와 닿는 통에, 결코 후루룩 읽어지지 않는다.) 그 중에 이런 문장들이 있다.

"우리는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현실에 '반대'하지 않고, 현실을 인정하고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다른(alternative) 현실을 살 수 있다. 

혁명은 사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재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6)."

"비판 의식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감사, 겸손한 마음에서 출발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나는 매사에 불만이 많은 데다 완벽주의를 욕망하는 타입이어서 사는 게 힙겹긴 하지만, 잠들기 전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좌절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실망할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반사적으로 "고맙습니다"하고 되뇐다(19)."

정확하게 지금 나 자신에게 필요한 문장들이다. 오늘 아침 이 문장들을 읽을 수 있어 참 감사하다.


지난 연휴 내내 그리고 어젯밤과 오늘 아침, 나는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기대로 우울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매일 출근을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아이 밥 잘 해먹이고 집안 정리도 잘 하고 이런 저런 일들도 빈틈없이 처리하며

동시에 남편에게도 그럴 듯한 아내 역할을 하는 여자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유능한 연구자이면서, 가정사도 매끄럽게 해내는 수퍼우먼.(쓰고 보니 웃기다, 이 표현 자체가.ㅋ)

나에 대한 남편의 불만이라 여겨졌던 싸인들도 실은 내 욕망의 투사는 아니었는지.

나는 완벽하지 않다. 내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좋은' 여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내게 주어진 역할들을 열심히 해내고 있다. 그러니 나는 나에게 감사하다.


(다짐과 확인과 감사의 글로나마 마음을 잡아보는 아침. 일기장이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