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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외롭다. 어릴 때부터 그랬던 거 같다. 내 옆에 아무도 없을 거 같고,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 같은 느낌. 허허벌판에 혼자 서서 엉엉 울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돌이켜보면, 엄마의 주된 정서도 외로움이었다. 그 외로움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나도 그 감정을 내 몸에 익숙하게 만든 거겠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실은 내가 외로울 일 없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나를 미친듯이 좋아하는 엄마가 늘 옆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모든 감정이 그렇지만, 외로움도 나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고찰 후에 얻어지는 게 아니라서, 그냥 혼자 그렇게 느꼈던 거 같다. 


깨달음 후에도, 가끔 외롭다. 이 감정은 예상치 못했던 시간에 나를 훅 치고 들어와서 어느 정도의 쓸쓸함을 남기고 떠나가곤 한다. 예전엔 외로움에 사로잡히는 게 꽤 심해서, 한 번 외로우면 두려움, 불안, 우울까지도 같이 막 왔는데, 그래도 요즘엔 가볍게 왔다 가는 것 같다. 며칠 전 좋아하는 선배의 모친상에 다녀왔다. 노환으로 돌아가셨고, 자식들이 임종도 지켜봤던, "복있는 죽음"이라 그렇게 애통하진 않았는데, 다녀오고 나니 또 좀 외로웠다. 엄마 생각이 나서. 그리움이 제법 사무쳐서... 혼자 간만에 울기도 했다. 뭐, 이 그리움이야 평생 가는 거겠지, 하고 툭툭 털어냈는데, 그래도 그리움이 왔다 간 자리에 외로움이 자리하고 있었던 거 같다. 엄마 없는 사람. 아무도 엄마만큼 살뜰하고 절실하게 나를 사랑하지는 않을 거야, 라는 생각. 마흔이 넘어서도 엄마 생각하며, 스스로를 가여워하며, 질질 짜네, 하고 스스로를 좀 놀리면서, 그랬다.


그런데, 이런 감정의 와중에 '그녀'가 내 집에 다녀가셨다. 마침 용인 시누이 집에 와계셨는데, 내 아이가 아프다는 얘길 듣고 달려오신 것. 우리집 냉장고를 다 뒤져서 요리 몇 가지를 하시고 두어시간 만에 가셨다. 그리곤 카톡으로 몇 마디, 겉으론 나와 아이와 동거인 걱정이었지만, 실제로는 나에게 요구하는 바가 있었던 그 말들. 그게 소화가 안돼서 어제 오후 내내 혼자 끙끙 대고, 아침에도 다 가시질 않아 동거인에게 몇 마디 털어놓고 집을 나섰다.


그녀는 집요하다. 집요하게 당신의 자식들을 사랑하신다. 겉으로 보기엔, 숭고하고 아름다운 자식 사랑, 이라 여기고 넘길 만한데, 그 가운데 내가 끼여있으니 넘기기 힘들 때가 가끔 있다. 나에 대한 친절과 베품인 줄 알았는데, 실은 그 대상이 동거인이나 아이인 걸 알았을 때의 황망함. 사뭇 진지한 걱정과 염려인 줄 알았는데, 알보고면 아내 역할 잘 하라는 요구일 때의 짜증.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그녀에게 뭘 바라고 있나 싶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녀의 집요한 자식 사랑이 내 외로움을 더 부채질 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나는 같은 여자도 아니고 옆집 딸도 아니고 오로지 당신 자식의 아내이다. 그래서 그녀의 자식 사랑을 실현하는 도구의 하나일 뿐. 외로움이 감정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나에게 그녀의 이러한 집요함은 나를 더 외롭게 만든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의 집요함을 만날 때마다 내 외로움은 더 깊어진다. 나는 엄마가 없는데, 동거인의 엄마는 그 사랑이 지극해서, 나에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만든다.


해법은, 거리를 두고 그녀를 지켜보는 것이다. 옆집 아줌마, 내 윗 세대 여성, 내 친한 친구의 엄마로 보기. 아, 저 세대 여자들은 자식 사랑이 저렇게 집요하구나. 며느리에게 저런 역할을 부여하면서 자신의 모성 역할을 완성하려는 것이구나. 그 집요함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읽히는지 조차 염두에 두지 않을 정도로 자기 중심적인 거구나. 그녀에게 우주는 곧 가족, 그 바깥의 모든 것은 가족에게 가용/불가용한 자원으로만 읽히는구나. 이렇게 그녀를 보면, 내 마음의 무거움이 덜어지겠지. 그런데, 당연하게도, 그게 잘 안된다. 그래도 연습해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떠올랐으니 다행. 지켜보기, 거리를 두고. 그녀가 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건드리기 전에 뒷걸음 치기. 건드린 후에도 거리 두기를 연습해보기. 얼마나 연습하면 잘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