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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가 끝나고 <미쓰홍당무>를 보고 매운 닭갈비와 맥주 한병을 둘이 나눠먹고 신촌서 합정까지 걸었다 밤은 깊어가고 한강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낮내내 달궈진 도시의 길을 식히는데 깔깔대고 떠들고 헌책방에 들렀다 함께 걷느라 시간이 금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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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기다리다가 미뤄둔일을 해치우는 심정으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침울한 목소리의 그는 함께 살기 시작한지 얼마 안된 며느리가 마음에 안들어 이런저런 푸념을 쏟아낸다 그러게 엄마만한 여자는 없다니깐 같이 있을 땐 왜 그리 고마운 것 모르고 싸우기만 했수,라고 마음 속 목소리는 한껏 커졌지만 나는 그를 위로하고 있었다 나이든 그가 가여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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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낮에 본 <더리더>는 <구구는 고양이다> 다음으로 나를 꺼이꺼이 울게 만든 영화였다 illiteracy라는 벽 안에 갖힌 한나의 삶과 죽음이 마음 속 깊이 있는 연민 죄책감 부끄러움을 건드렸던 것 같다 문자와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와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결을 보여준 윈슬렛의 연기에 찬사를, 문자의 질서가 가진 폭력성을 드러낸 작가와 감독에게 감사를 보내고 싶었다 교육과 계몽이 닿을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걸 성찰한다면 다른 식의 기획이 가능할까 라는 고민이 시작되었고 경계 밖에서 서성이는 존재들의 삶을 드러내는 일을 이 질서의 중심에 깊이 들어와있는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엄습했다 여러모로 곱씹고 싶은 영화 다시보고 또 보고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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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점점 친해지고 있구나 하고 혼자 웃는 순간 발을 잘못 디뎠다는 걸 퍼뜩 깨달았다 관계의 미숙함이 다시 반복된다는 두려움도 있지만 이번만은 마음을 잘 지켜봐야지 싶어서 사뭇 진지한 시도에 뭔가를 걸어본다 여름까지도 그 아이와 멀지 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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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게 핀 꽃이 아름다움으로만 다가오지 않는 첫 봄, 꽃보다 그 꽃그늘에 내 시선이 머물러 있는 걸 연민하지 말자 죽는 순간까지 이 그늘과 함께 가야한다고 그냥 받아들이면 그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