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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시대, 정말 오는가
조한혜정 교수, 근대를 넘어서는 상상력 강연 2009년 10월 12일(월)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협력,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문강좌 행사가 최근 줄을 잇고 있다.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행사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석학들이 진행하는 인문강좌를 연재한다. [편집자 註]

석학 인문강좌 10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문화인류학)는 ‘여성의 시대는 오는가’란 제하의 강연을 통해 여성 관점에서 본 한반도 여성의 역사를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그리고 여성이 억압받던 중세 질서에 최초의 반란을 일으킨 여성으로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을 꼽았다.

▲ 10일 한국연구재단 주최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의 누나이기도 한 허난설헌은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어깨너머로 글을 배우고,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 신동으로까지 불렸다.

그러나 결혼 생활이 순탄치 못한 가운데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 27세에 요절했는데, 그녀가 남긴 시 213 수중에는 당시 (남성 우선의) 봉건적 현실을 초월한 도가사상의 신선시(神仙詩)와 함께 여성으로서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하는 자신의 고민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한국의 여성운동, 교육에 집중

허난설헌이 세상을 떠난 지 약 300년 후에는 나혜석(羅蕙錫, 1896~1946)이라는 영민한 학생이 출현한다. 그녀는 오빠의 추천과 사랑을 받으며, 일본 유학생이 됐고, 유학시절 최승구, 이광수 등과 사귀면서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선각자로 살아간다.

그녀 역시 결혼생활이 순탄치 못했다. 화가로서 명성을 날렸으나 유럽 여행 중에 있었던 최린(崔麟)과의 만남이 문제가 돼, 1931년 변호사였던 남편 김우영과 이혼을 한다. 그리고 ‘우애결혼, 실험결혼’, ‘이혼고백서’ 등 인습적인 사회 도덕관에 저항하는 글을 발표한다.

▲ 서양화가 나혜석 
나혜석은 당시 여성들에게 ‘자아’를 가질 것과 시집살이에서 벗어나, 부부중심의 민주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그녀의 요구는 당시 ‘아들들’이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벅찬 것이었고, 당시 한국 상황에서도 너무나 급진적이었다고 조한혜정 교수는 말했다.

해방 후 인물로는 김활란(金活蘭, 1899~1970) 여사를 꼽았다. 당시 한국의 딸들은 실제로 (저절로 주어진) 참정권보다는 교육권을 두고 꾸준한 여성운동을 벌여왔는데, 그 중심에 김활란 여사가 있었다는 것. 여성교육을 강조한 김활란 여사의 노력은 한국의 여성들을 근대적 국민으로 변화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고 평했다.

조한혜정 교수는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국민으로서’ 자신의 원하는 국가를 상상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라고 말했다.

여성운동단체들이 만들어져 다양한 이슈들을 제기하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여성폭력을 방지하려는 ‘여성의 전화’, 여성운동을 민중운동 차원으로 바꿔가려는 ‘민우회’, 일상에 있어 남녀평등 구조를 이루기 위한 ‘또 하나의 문화’ 운동 등을 예로 들었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 … 취업이 필수

1980년대 여성 반란의 성과는 1990년대 각 대학에서 앞 다퉈 여성학 과목을 개설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984년 이화여대에 여성학 대학원이 설립됐으며, 여성학은 1990년대 당시 교양과목으로 가장 인기 있는 과목으로 부상했다고 말했다. 신문과 방송 역시 이런 변화를 대대적으로 다루면서 양성평등 사회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2009년 현재.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신의 생애를 ‘가정주부’가 아닌 ‘커리어(career)’라는 단어로 구성해가고 있다.

‘취업은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표어가 지금 구호가 아닌 현실로 나타나고 있으며,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 딸들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당당한 직장인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조한혜정 교수는 말했다.

▲ 연세대 조한혜정 교수(문화인류학) 
가장 두드러진 사례로 행정·외무 고시의 여성 합격률이 급증하고 있는 점을 지목했다. 행정고시의 경우 2004년 38.4%, 2005년 44.0%, 2006년 44.6%, 2007년 49.0%, 2008년 51.2%를 기록했다. 외무고시의 경우 2005년 52.5%에서 2006년 36.0%, 2007년 67.7%, 2008년 65.7%로 늘어났다.

전체적인 여성 취업활동 역시 두드러지고 있다고 보았다. 특히 마케팅 3대 사업 부문 책임자들 대부분이 여성으로 채워져 있는데, 이는 여성들이 소비자 트렌드를 잘 읽고, 고객 친화적인 감성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나혜석이 ‘부부 당사자 간의 애정’에 기반을 둔 ‘사랑 가득한 가정’을 말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지 3세대가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로부터 해방된 아들과 시집체계로부터 해방된 딸들이 부부중심 핵가족을 이루고 맞벌이를 하며 사는 것이 삶의 주류적 양태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취업 주부인 30대 커리어 우먼들을 인터뷰하면서 조한헤정 교수는 직장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그들이 별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직장과의 ‘허니문’을 끝낸 여성들은 지금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직장’을 낯설게 바라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

삶에 대해 고민하는 커리어우먼들

“도대체 나는 누구를 위해, 또 무엇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해왔단 말인가?”, “직장이란 내게 무엇이며, 성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아이를 키우는 일보다 중요한 일일까?”, “가정을 희생하면서 계속 일할 가치가 있는가?”란 질문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한혜정 교수는 성공적인 커리어우먼의 삶을 살아온 이 장년의 여성들은 그동안의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점점 더 노동 강도가 심해지는 직장 일에 불만을 드러내고 있으며, 자신의 일이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커리어우먼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육아 문제라고 말했다. 한 여성은 아이가 유치원 가기 전까지 잘 키우면, 그 이후에는 여유가 생길 줄 알았는데, 아이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오히려 일이 더 많아졌다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는 것.

엄마가 풀타임 매니저처럼 아이를 따라다니지 않으면 ‘실패’처럼 몰고 가는 사회 분위기와 아이를 맹목적인 입시체제에 집어넣는 것 외에 다른 특별한 대안이 없는 현실 사이에서 많은 여성들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조한혜정 교수는 말했다.

조한혜정 교수는 지금 우리가 성(性)을 불문하고, ‘성공’을 향해 치닫는 존재, 가정 영역과 무관한 타산적 개체, 고립된 개인들을 키워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남성과 여성이 한데 모여, 돌봄과 학습이 있는 사회를 회복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09.10.12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