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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달이 걸어오는 밤이 있다
달은 아스피린 같다
꿀꺽 삼키면 속이 다 환해질 것 같다

내 속이 전구알이 달린
크리스마스 무렵의 전나무 같이 환해지고
그 전나무 밑에는
암소 한 마리

나는 암소를 끌고 해변으로 간다
그 해변에 전구를 단 전나무처럼 앉아
다시 달을 보면

오 오, 달은 내 속에 든 통증을 다 삼키고
저 혼자 붉어져 있는데.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
다시 그 달을 꿀꺽 삼키면
암소는 달과 함께 내 속으로 들어간다

온 세상을 다 먹일 젖을 생산할 것처럼
통증이 오고 통증은 빛 같다 그 빛은 아스피린 가루 같다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

-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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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ㄴ네 블로그 갔더니 허수경의 시가 있어서, 그 시가 내 마음에 짠하게 들어와서,
그냥 긁어서 복사하지 않고, 한 자 한 자 쳐서 옮겼다.
토론토 올 때,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가져올까 말까 만지작 댔었는데,
비행기로 열 네시간, 시차도 열 네시간 떨어져 있는 내 방 책장 거기에 꽂혀있을 그 시집이
갑자기 아쉽다.

나는 '다시 그 달을 꿀꺽 삼키면'이 좋다.
앞으로 이 시를 보면 작고 똘똘하게 생긴 허수경 시인보다,
자꾸만 씩씩해져 가는, 그래서 더 멋져지는 ㅇㄴ가 생각날 것 같다.
내 삶에서 '고통'이라는 것이 피하고 싶은 그 무엇만이 아니라,
기꺼이 '꿀꺽 삼키'는 것이 되는 그 순간,
골목길을 돌아 전혀 새 길에 들어서는 것처럼,
삶의 새로운 장면이 펼쳐진다는 것을,
요즘들어 알게 된다, 아니 믿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