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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흑인과 언어

언어란 절대적으로 타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3).

앙띨레스에 사는 흑인들은 불어 구사 능력에 따라 백인화의 정도를 평가받는다(24).

언어를 정복하게 되면 형언 불가능한 힘을 선사받게 된다(25).

사실 흑인만의 문제란 없다. 혹여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우연적이기는 하지만 백인과 관련되어 있다(39).

정작 흑인을 분노케 하는 것은 이런 의도나 의지의 부재, 관심의 결핍, 무관심, 흑인들을 곧이곧대로 재단하고, 가두고, 야만인 취급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태도 그것이다(42).

흑인은 착하고 말 잘 듣는 검둥이로만 여겨질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검둥이들을 무작정 교육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원형, 즉 노예의 탈을 벗도록 가르치는 일이다(45).

앙띨레스 출신의 학생들이 파리에서 만나면 그들은 두 가지 선택적 가능성을 선보인다. 하나는 백인 세계(앙띨레스 출신의 학생들 입장에서 볼 때 유일한 실제 세계)에 동화되는 것, 그리고 결국 불어를 배우게 될 것이므로 특정한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혀서 보편적인 결론을 획득하는 것. 다른 하나는 유럽, 즉 타자를 거부하는 것, 그리고 자신들의 방언에 매달려 소위 마르티니끄 환경 속에서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48~49).

* 크리올(creole)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언어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 상인 등에 의하여 자연스레 형성된 언어(피진)가 그 사용자들의 자손에 의하여 모국어화된 언어를 말한다. 크리올이 공용어공통어로서 인정되는 나라들도 있는데 파푸아 뉴기니톡 피신히리 모투, 솔로몬 제도솔로몬 제도 피진어, 바누아투비슬라마 등이 대표적이다. 크리올은 피진의 단순함을 넘어서 시제, 진행형 뿐 아니라 일반적인 형태의 조어법까지 생기는 등 언어의 복잡한 현상을 다수 드러낸다. ‘크리올’이라는 이름은 신대륙 발견 뒤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에스파냐인의 자손을 일컫는 크리올로(criollo)에서 비롯하였다.

* 피진(pidgin)은 외부로부터 온 무역상들과 현지인이 만나면서 의사소통때문에 자연스레 형성된 혼성어를 부르는 말이다. 피진이 뿌리내려 모국어로서 사용되는 말을 크리올이라 한다. 피진은 옛식민지 지역에서 현지에 확립된 언어가 없는 곳에 많이 있다. 피진은 교역에 따른 언어접촉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으므로 어휘는 단순하고 격변화따위의 복잡한 문법규칙이 없다. 서로 만나는 두 언어 가운데 어휘는 상층어에서, 문법구조는 하층어에서 따오게 되며 전체적으로 단순해진다. 두 집단의 상업활동이 약화되면 저절로 사라지고, 접촉빈도가 더 잦고 세지면 상위어 자체를 배우게 되므로, 불안정한 언어일 수밖에 없다. ‘피진(pidgin)’이라는 말은 영어 단어인 "business"의 중국 피진 영어 발음에서 비롯되었다.(위키피디아)


2장 유색인 여성과 백인 남성

백인의 성역 속으로의 진입을 시도하는 흑인의 욕망은 바로 그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다(66).

유색인 여성은 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흑인 여성이고 다른 하나는 물라토 여성이다. 흑인 여성은 단 하나의 가능성과 단 하나의 관심만을 갖는다. 백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다. 반면에 물라토 여성은 백인이 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관심 뿐만 아니라 다시는 흑인이 되지 않고자 하는 것에 대한 관심 또한 만만치 않다. 물라토 여성에겐 흑인 남성을 남편으로 맞는 것만큼 부조리한 것은 없다(69).

원천적으로 금기시된 한 재원의 내면화를 통해서 그 재원을 확보하려는 중층적인 노력의 과정말이다. 흑인 여성들이 백인 세계로의 입성을 꿈꾸는 이유는 열등감 때문이다(75).


3장 유색인 남성과 백인 여성


백인이 세계를 지배하는 동안 흑인으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꿔보지 못했던 그 순백한 살결에 대한 욕망에 이끌려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결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세기에 걸쳐 내 종족에게 가해를 입혔던 그 백인 여성의 조상에게 그녀를 이용해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고 있다는 말이다(91).


4장 식민지 민중의 의존 컴플렉스

식민주의라는 문제는 객관적인 역사적 조건 뿐만 아니라 그 조건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까지도 상관적으로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09).

흑인 프롤레타리아를 향한 백인 프롤레타리아의 공격적 성향이 근본적으로 남아프리카의 경제구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112).

식민주의적 인종차별주의는 결코 그 어떤 인종차별주의와도 다르지 않다(114).

유럽의 문명과 그것을 대표할 만한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단순한 인종주의가 아니다. 그들이 책임져야 하는 것은 식민주의적 인종차별주의이다(114).

열등한 대상을 조작해낸 장본인은 바로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 유태인들을 창조한 사람은 바로 반유대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118).

그가 말라가시인인 이유는 백인의 출현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한 특정단계에서 그가 그 자신에게 진정 그가 인간인지 아닌지를 자문해야만 하는 이유도 인간으로서 그 자신의 실체가 도전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백인이 그에게 인종차별의 부담을 지우고 그를 식민지 노예로 부리며 그의 모든 가치와 개성을 박탈하고 그를 세상의 기생충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그로하여금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게 백인과 보조를 맞추도록 강요하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짐승이고 나와 내 동포는 달콤한 사탕 수수와 비단 면화를 기름지게 가꾸는 걸어다니는 똥더미이며 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임을 자백하도록 강요하는 정도까지, 그는 백인이 아닌 것이며 그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것이다(123-124).

* Aimé Fernand David Césaire (26 June 1913 – 17 April 2008) was an African-Martinican francophone poet, author and politician. He was "one of the founders of the négritude movement in Francophone literature".
Aimé Césaire was born in Basse-Pointe, Martinique in 1913. He traveled to Paris to attend the Lycée Louis-le-Grand on an educational scholarship. In Paris, Césaire, who in 1935 passed an entrance exam for the École normale supérieure, created, with Léopold Sédar Senghor and Léon Damas, the literary review L'Étudiant Noir (The Black Student). In 1936, Césaire began work on his book-length poem Cahier d'un retour au pays natal (Notebook of a Return to My Native Land, 1939), a vivid and powerful depiction of the ambiguities of Caribbean life and culture in the New World and this upon returning home to Martinique.
Césaire married fellow Martinican student Suzanne Roussi in 1937. Together they moved back to Martinique in 1939 with their young son. Césaire became a teacher at the Lycée Schoelcher in Fort-de-France, where he taught Frantz Fanon and served as an inspiration for, but did not teach, Édouard Glissant. He would become a heavy influence for Fanon as both a mentor and a contemporary throughout Fanon's short life. (위키피디아)


* 프로스페로와 칼리반에 관해 (출처: http://blog.aladin.co.kr/mramor/2520636)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 가운데 식민주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마지막 작품 <폭풍우>(1611)다. ‘태풍’ 또는 ‘템페스트’란 제목으로도 번역·공연되는 이 작품은 보통 희비극으로 분류되는데,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나폴리의 왕 알론소 일행은 아프리카 튜니스에서 결혼식을 마친 뒤 배를 타고 돌아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난파하여 어느 섬에 도착한다. 그 섬에는 12년 전 밀라노의 공작이었다가 동생 안토니오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어린 딸 미란다와 도망쳤던 프로스페로가 살고 있다. 알론소 일행을 난파시킨 폭풍우는 그가 복수를 위해 마법을 부려 일으킨 것이다. 
처음 프로스페로가 도착했을 때 섬은 시코락스라는 여자 마법사가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스페로는 그녀를 물리치고 그녀의 아들이기도 한 ‘야만인’ 칼리반과 많은 요정을 노예나 부하로 삼는다. 그는 알론소와 안토니오를 다시 만나 용서하고서 미란다를 알론소의 아들 페르디난드와 결혼시키고, 그 자신은 밀라노 공작의 지위를 회복한다. 한편 칼리반은 주인인 프로스페로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계획하지만 실패하고 그에게 용서를 구한다. 
작품의 중심 플롯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알론소 일행에 대한 프로스페로의 복수’와 ‘프로스페로에 대한 칼리반의 반란’이다. 전자가 권력 쟁탈전의 양상을 띤다면, 후자는 ‘식민지 해방 투쟁’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여기서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관심이 대상이 되는 것은 ‘프로스페로와 칼리반의 관계’다. ‘칼리반(Caliban)’이라는 이름 자체가 식인종을 뜻하는 ‘캐니벌(cannibal)’에서 왔다는 점은, 이 작품에서 ‘원주민’ 칼리반이 어떻게 형상화되는지 미리 짐작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작품 속에서 그는 주로 ‘야만적이고 흉측한 노예’로 소개된다. 2막에서 칼리반을 처음 본, 알론소의 광대 트린쿨로는 아예 이렇게까지 말한다. “이게 뭐야? 인간이야? 생선이야? 죽은 거야? 산 거야? 생선이네. 생선 냄새가 나. 잡은 지 오래된 생선 냄새야. 싱싱하지 않은 말린 대구 같은데. 괴상한 생선인걸!” 그는 이 ‘괴물’을 영국으로 데려가면 한밑천 잡을 거라고 상상한다. 영국인들은 죽은 인디언을 구경하는 데도 돈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식민 시대에는 원주민들이 서커스단의 동물처럼 구경거리로 전시되어 돈벌이에 이용되기도 했다. 프로스페로의 표현을 빌리면, 칼리반은 ‘악마와 사악한 마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악한 노예’일 뿐이다. 이런 부정적인 묘사 때문에 <폭풍우>의 공연사에서 칼리반은 17세기에는 야만스러운 괴물로, 18세기에는 다양한 악행의 구현자로, 19세기에는 반인반수(半人半獸)로, 그리고 20세기에는 인간에 내재한 야수성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평가는 식민주의적 시선만을 일방적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애당초 섬의 주인은 칼리반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칼리반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섬은 내 거야, 내 어머니 시코락스 거였으니까. 그걸 네가 나한테서 뺏어 갔지.” 처음 프로스페로와 대면했을 때 칼리반은 그의 온정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섬의 구석구석을 보여 주었다. 프로스페로는 그런 칼리반에게 미란다를 강간하려 했다는 죄를 씌워 마법으로 제압하고, 바위 안에 가둔 다음 노예로 삼아 버린다. 칼리반을 부를 때마다 욕설을 입에 담지만 형편상 그가 없으면 곤란하다. 칼리반이 불도 지피고, 나무도 해 오고,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약탈과 지배는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미란다의 말은 시사적이면서도 노골적이다.  

“난 너를 측은히 여겨 말을 가르쳐 주었고, 매번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이 야만종, 네가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짐승처럼 어버버거릴 때 내가 말이 통하게 해 주었다. 아무리 가르쳐도 네놈의 비천한 천성은 고쳐지지 않아. 선량한 우리로선 곁에 두고 봐 줄 수가 없어. 그러니 바위 속에 가둬 두는 것은 당연하지.”


하지만 칼리반 가르치기는 결코 시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칼리반에 대한 ‘계몽’은 부차적이며, 오히려 그에 대한 지배를 더욱 원활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곧 프로스페로와 미란다의 언어 교육은 칼리반이 말을 더 잘 알아듣게 만들어서, 더욱 쉽게 부려먹고 착취하기 위해 이루어졌을 뿐이다. 19세기 이후 ‘영어’가 식민지 지배의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대목은 셰익스피어의 날카로운 통찰로도 읽힌다.  
그러면 칼리반은 이러한 ‘주인의 논리’에 어떻게 대꾸하는가? “네년이 내게 말을 가르쳤지, 덕분에 난 저주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붉은 종기 역병에나 걸려라, 이년.” 칼리반의 욕설은 그가 받은 교육의 결과이며 ‘되받아치기’다. 칼리반은 제국의 언어를 배우지만 그 언어로 욕을 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문명화’ 교육의 이면을 드러내 주면서 저항의 가능성도 제시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칼리반의 저항, 곧 반란 기도는 실현되지 않는다. 알론소의 집사인 술주정뱅이 스테파노를 새로운 왕으로 모시고 프로스페로에게 대항하려 하지만, 그의 반란은 희화적으로 묘사될 뿐 결국 프로스페로의 사냥개들에게 단숨에 제압당한다.  
빼앗긴 자신의 섬을 되찾으려는 칼리반의 시도는 식민지 해방 투쟁에 값하지만, 그는 이것이 스테파노라는 새로운 주인을 섬김으로써 가능하리라고 본다. 셰익스피어의 정치적 입장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다. 그는 지배 권력에 대한 저항을 탐욕과 환상이 빚어낸 어리석은 행동으로 줄곧 그려 왔고, <폭풍우>에서 칼리반의 반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프로스페로가 자신의 적들을 모두 용서하는 5막은 전형적인 셰익스피어식 대단원으로, 그의 용서를 받은 칼리반은 다시금 ‘길들여진 노예’ 상태로 돌아가 자발적으로 순종을 맹세한다. 그들의 확고한 주종 관계가 재차 확인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결말을 통해 셰익스피어는 ‘야만인’ 칼리반이 교정이 필요한 위협적인 존재이고, 강간이나 모반 같은 그의 반(反)사회적 행위는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그 당시 연극의 주된 관객이었던 영국 지배 계급의 식민주의적 태도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