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1년 3월 22일 화요일.

수업 3주차. 교실이 조금 데워진 느낌이 든다. 수업하러 가면서 느껴지는 내 마음도 긴장보다는 기대와 흥분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오늘은 지난 수업에 비하여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이 좀 짧아졌는데, 이 추세로 가면, 얼음이 녹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교실이 점점 더 시끌벅적 해지겠지, 싶다.

보울즈와 진티스의 논문 [교육과 인간발달]을 읽고 학생들이 올린 논평문을 피드백하고 채점해서 가져갔는데, 역시 점수를 명시해서 나눠주니 교실에 긴장감이 흐른다. 1점 차이에 희비가 엇갈리는 경험이 너무 많아서, 어떤 점수라도 그것이 곧 능력의 척도인양 여겨지는 것,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냥 거기에 좀 둔감해지는 것. 이것이 점수를 명시해서 주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한데.

학교교육과 계급 불평등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교육과 인간발달]은 교육사회학의 대표 논문이면서도 꽤 오래된 논문이라 학기마다 이걸 다뤄야하나 망설이게 된다. 그런데 오늘 수업을 하면서, 이걸 같이 읽기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JHEE의 반응처럼, 교육에 관해 긍정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에게 완전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자극이 된다. 그리고 이 논문의 급진적인 주장은 현재의 시점에서도 많은 이야기 꺼리를 던져주는 것 같다.

"보울즈와 진티스는 이 논문을 통해 '학교교육은 현실에 대한 만족 혹은 숙명론이라는 의식의 재생산을 통해 자본주의 계급 불평등을 재생산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 교육 현실에 적합하지 않다. 복지 시스템이 부실하고 비정규직 노동 현실이 열악한 한국사회의 경우, 노동계급 부모들도 온갖 자원을 동원하여 자녀를 소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한다. 이 한국식 교육열은 학교교육이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계급 이동의 기재라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교육 시스템에서 '실패'하는 것은 개인의 불성실과 무능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순응적인 노동자를 만들어냄으로써 숙명론을 재생산하는 미국 맥락과는 다른 '한국식 숙명론'이다. 예외적인 존재인 '개천에서 난 용들(개룡남, 개룡녀들)'에 관한 담론은 이 '한국식 숙명론'을 공고하게 만든다. 이것이 한국 학교교육이 계급 불평등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방식이다."

논문의 핵심주장과 논거들을 함께 검토한 후 이루어진 토론에서 위의 단락과 같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저 이야기들은 나의 강의록에도, 누군가의 논평문에도 쓰여있지 않았던 내용이었는데, 교실에서 이야기들이 탁구공처럼 핑퐁 왔다갔다 하면서 한국의 교육열과 계급 재생산의 문제를 연결시키는 고리를 만들었다. 더불어 [교육과 인간발달]이라는 교육사회학 고전을 지금 여기서 다시 읽어야하는 이유를 도출하기도 했다. 이런 걸 집단지성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들 각자는 이 수업 공간 안에서 지식생산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 토론을 하면서, 나는 잠깐, 서울대생들이 느끼는 열등감과 우월감도 실은 교육에서의 실패와 성공이 개인에게서 비롯된다는 믿음 때문이 아니냐고 질문해보았다. 한국식 숙명론은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이라는 이 곳에서도 예외없이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자괴감과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지만, 학교와 교육당국의 해법은 언제나 상담(스누콜)이나 치료(보건소의 정신과 치료)와 같은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당연하겠지만) 한국의 교육 문제라는 건 사실 내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의 일상과 맞붙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문제로 돌아와서 한국 교육을 다시 봐야하는 것인지도.

여전히, 지난 수업에서 DY가 제기한 질문 '왜 그들은 순응하는가?'는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교육과 인간발달]을 읽으며 JHEE가 느낀 불편함과 KH이 논평문에서 제시한 교사의 역할, 그리고 SH가 제기한 인간 주체 형성의 문제도 앞으로 다루어야할 이야기들이다. 이 질문들과 문제들을 잘 간직하고 있어주길.

수업 말미에는 '자신을 잘 드러내는 복장'을 하고 와보라는 나의 주문에 부응해 '이쁘게 입고온' 학생들 각자의, 자기 복장에 관한 설명들이 이어졌다. 키워드는 이런 것들: 센스있는 여자 대학생. 중산층 스타일. 무난한 머슴애 스타일을 탈피하는 것. 꾸민 듯, 안꾸민듯. 트랜드와 누나의 조력. 무난하고 오래 입는 옷. 제한된 돈 안에서의 내 스타일. 5주차 수업에서 오늘의 이 복장들이 이론과 분석의 힘을 빌어 어떤 새로운 통찰을 가져오는 재료가 될 것이라 기대해본다.

선생 입장에서는 교실이 점점 데워지고, 말과 말을 주고받으며 시너지가 일어나는 장면을 보는 게 기분 좋다. 그런데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못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이런 변화가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상대적으로 말이 적은 학생들을 응원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된다.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이 응원이라는 것도,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되고 친숙해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여전히 선생인 나에게는 배려와 관심이 중요한 화두이다.

앞으로 2주간 '반말로 이야기 하기' 실험을 시작한 온라인 공간도 조금씩 뜨거워지고 있다. 아, 흥미진진하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 시공간들이 어떤 식으로 변화되고 익어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