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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논문 일기

0328, 月

새빨간꿈 2011. 3. 28. 20:52


1. 뒤늦은 이해의 순간

인터뷰 녹취 파일 다시 들으면, 당시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인터뷰이의 감정이나 맥락들이 그제사 아, 하고 이해 되곤 한다. 뒤늦은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 오는 것이 다행스럽다. 이 깨달음의 순간들이 바로 논문을 쓰는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런데, 대부분의 대화는 녹음이나 기록을 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이해가 뒤늦게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별 효용이 없다. 그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때 나는 그렇게 너를 이해하지 못했노라고 고백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그럴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경우도 있다. 오랫동안 아니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람과의 대화였다면, 뒤늦은 깨달음은 그저 후회하는 마음으로 이어질 뿐.
요즘은, 남의 이야기 잘 안들어주(고 지 얘기만 열심히 하)는 내 (안하무인) 성격 탓에 그 때 그 장면에서는 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상대방의 이야기와 마음이 자꾸자꾸 떠오른다. 그래서 좀 괴롭다.

 
2. 불안한 주말

주말에, 간만에 쇼핑을 하고, 반찬을 네 가지나 만들어놓고, 자전거도 좀 탔다. 인디언블루 컬러 매니큐어와, (새)빨간 플랫슈즈, 네이비+엘로우 발랄한 워킹화, 파스텔 톤 귀걸이들과 얇은 반지 하나를 완전 싼 가격에 득템! 생전 처음 만들어보는 무나물과 단골 반찬인 두부조림, 콩나물 볶음 그리고 쑥 된장찌개를 한 시간 반 만에 완성, 백만년만에 빛나는 밥상을 차려 그득그득 먹기도 했다. 겨우 내 세워뒀던 자전거 꺼내서 조금 먼 동네까지 다녀오며 라이딩의 기쁨도 맛보고.

그런데 마음이 불편했다. 즐겁긴 했지만, 충만하진 않더라고. 가만 보니 불안함이 있었고, 거기엔 논문이 있다. 약속한 기한에 끝낼 수 있을까? 논문 쓰는 사람이 주말에 이렇게 놀아도 되는 걸까? 예전에 어떤 선배는 불안함 때문에 주말에도 매일 학교에 나온다고 했다. 나는 불안함 때문에 주말에 놀아도 논 거 같지가 않구나.


3. 내버려 두기

친구랑 싸우고 나면, 나는 먼저 가서 화해하자고 하는 편이었다. 그건 친구의 입장이 이해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불편함이 싫어서였다. 애인과도 그랬고, 남편이랑도 그랬다. 싸우고 화가 나있는 채로 한 시간, 하루, 일주일이 가는 건 상상이 잘 안됐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관계를 '정상화' 해놓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ㅇㄴ가 쓴 수업일기에서, 관계의 문제를 시간에 맡기는 여유를 읽는다. 나의 불편하고 괴로운 마음을 그냥 바라보기. 더불어 상대에게도 관조에 다다를 시간을 주기. 그러면서도 내가 그에 대해 가졌던 진심의 순간을 기억해두기. 이 여유는 그 관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아무래도 ㅇㄴ는 나보다 한 수 위다.


4. 하루의 2부

오늘, 학교에 오기가 싫어서 낑낑대다가 오후 4시쯤에야 겨우 등교했다. 자리에 앉아 막 공부 시동을 걸고 있는 5시 즈음, 연구실을 차지하고 있던 '아줌마 학생'들이 대거 퇴근한다. 아침 일찍 학교 나와 공부하다가, 초저녁이면 베이비 시터에게서,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찾아 귀가하는 여자들. 그녀들에겐 지금부터 하루의 2부가 시작되겠구나. 저녁을 지어먹고 아이와 남편과 시간을 보낼 그들의 일상이 잘 상상이 안된다. 나에게 하루의 2부는 무얼까. 밤까지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거나 티브이 보며 낄낄대거나 저녁 운동을 하거나 저녁식사 (혹은 음주) 데이트? 아이가 없다는 것, 그래서 '아줌마 학생'들 대열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 이 사실이 지금 나에게 위안이 된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