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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7일 화요일

오늘 점심 시간은 좀 특별하다. 도서관 계단 아래 쪽, 사범대 노래패 '길'의 공연 모습을 멀찌감치서 본다. 점심을 먹고 자하연 앞으로 와서 문화 인큐베이터와 아름다운 가게의 바자회 구경을 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오월 십팔일. 천구백팔십년 오늘, 광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과방의 작은 티브이로 끔찍한 영상을 보았던 게 언제쯤이었을까. 일학년 봄이었으니 그것도 벌써 십오년 전 일이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대학생들은 더이상 데모를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열심히 동아리 공연을 준비하고, 세미나 커리큘럼이 수업 텍스트보다 더 중요하고,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있는 선배를 면회가고, 혁명의 역사를 읽으며 가슴 두근거리던 대학생이 시간강사가 되어 교육과 불평등과 계급과 젠더를 가르치게 된 시간의 흐름. 그 시간 앞에 서서, 햇볕까지 뜨거웠던 오늘 점심 시간, 나는 조금 휘청거렸던 것 같다.

자기계발의 시대, 그리고 세대. 대학에서 맞닥뜨리는 이십대들의 눈에 생기가 차있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불안과 경쟁심리, 열등감과 우월감, 시간을 쪼개쓰는 능숙함 그리고 감정과 육체 마저도 관리하고 제어하는 노련함. 이런 것들을 강의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때로 놀라고 절망하고 원망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제 그리고 오늘, 아직 추상적이긴 하지만 새로운 질문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제까지 접했던 것만이 아닌 다른 결들이 이 대학에 그리고 대학생들에게 숨겨져있는 건 아닐까하는 기분 좋은 의심증.

어제 수업을 마치고 가졌던 뒤풀이에서 SHSWHJ는 (장난삼아 였지만) 인정과 위로를 나누었다. 몇 주전 온라인에서 오갔던 논의들이 마주보고 앉은 이야기들 속에서 조금 갈피를 잡은 듯. 논리와 논리 간의 싸움 아래로 흐르는 감정의 흐름들. 필요했던 건 인정과 위로라는 걸 알게 되자, 문제는 조금 간단해졌다. 남들이 어떻게 살아도 나만 잘 살면 된다,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위선 만큼이나 흔한 위악으로 방어막을 치고 있는 것일 뿐. 귀가길,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자기계발과 경쟁의 시대, DW은 왜 사람들 앞에서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일까, SH는 왜 논쟁의 불을 붙이고 그 논쟁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열렬히 말을 걸어왔던 것일까, 모두들 수업 마다 안빠지고 들어와 세 시간 동안 열중해서 토론하는 저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뒤풀이도 열심이고 MT까지 가자는 이들의 이 에너지들은 무엇일까. 새삼 이런 질문들을 하느라 어제 귀가길은 유난히 짧았다.

이번 수업에서 다룬 것은 삼십여년 전쯤 영국에서 나온 질적 연구 보고서, Learning to Labor 였다. 여기 등장하는 '싸나이'들의 행위는 무엇이고 어떤 효과를 갖는지. 그들의 저항이 결국은 노동계급 재생산에 기여했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결론을 두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그 행위들 자체가 갖는 의미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는지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탁구공이 이리저리 튀어다니듯, 경쾌한 리듬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능숙한 토론의 분위기. 누군가의 이야기를 잘 듣고, 거기서 튀어오르는 자기 생각을 잡아내 언어로 표현해내고, 그 가운데 새로운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 본격적으로 그 토론 장에 뛰어들지 않는 나 마저도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는 그 시간들.

처음엔 학교가 금지하는 것을 해내는 것이 싸나이들의 저항 행위로 보였지만, 토론이 진행될 수록 그들의 행위가 무엇을 토대로 하고 있고 어떤 의미를 갖는지 구체화되었다. DY의 이야기대로, 육체 노동자들의 마을인 해머타운에서는 노동계급 성인 남자들의 문화가 가장 힘이 셀 것이다. 싸나이들은 학교에서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것, 육체 노동자 남성의 행위와 멘탈리티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 내 권력 관계가 역전되는 것이다. 교사보다, 우등생보다 더 '쎈' 이 '싸나이'들은 공식적이고 물적인 토대가 단단한 학교라는 권력에 맞서서 게임을 한다. 그것도 너무 신나게 재미있게 하기 때문에 학교의 의미체계 자체가 전복되는 것이다. 비장하지 않은 저항. 이들의 힘은 여기서 나오는 것.

수업 후반부에서는 2011년 한국의 대학생들은 어떤 저항을 하고 있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잉여짓, 할 일 미루기, 인터넷에서의 창작 활동(?), 동아리 등 다른 활동에 집중 하기와 같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이 이야기의 장에서 KH은 조금은 외부자적 입장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여기, 이 좋은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의 저항은, 학교를 관두는 것, 특권을 버리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저항이 꼭 그 한가지 방식으로만 표출되는 건 아니지만, 분명 그것이 투신 혹은 헌신의 방식이긴 할 거라고 나도 말을 보태었다. 몸을 던지지 않고서 거센 힘에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그러나 그것이 비장하지 않고 유쾌하려면, 신나고 재미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런 고민들이 수업을 닫으며 내 머릿 속을 떠돌았다.

SH는 행동하지 않고 이야기만 하는 '우리'들을 비판했다. SW은 사회학은 세상을 해석하는 역할을 하면 된다,고 맞받아쳤다. 그 자리에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어쩌면 행동(실천)과 해석(이론) 사이에 뭔가가 있는 건 아닌지. 어제 귀가길에 내가 던졌던 질문들도 그 사이의 무언가와 맞닿아있겠지. 아직 수업도, 토론도 끝나지 않았다는 게 새삼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