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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간은 참 더디가는데, 또 어떤 시간은 참 빠르다. 4월이 어느새 반이나 흘러가버렸나, 오늘 문득 망연자실.

 

어제 오후엔 동네를 좀 걸었다. 요가를 하지 않는 요일엔 산책을! 벚꽃이 핀 길을 걸어 약국에 가서 철분제 한 통 사고, 건너편 빵집에서 바게트 한 개를 산 후, 제법 떨어져있는 동네 화원까지 가서 흙을 한 봉지 샀다. 늦은 오후, 바람이 조금 차가워졌지만 마루 창을 열어두고 신문지를 넓게 깐 다음, 한 시간 남짓 분갈이를 했다. 좁은 화분에 뿌리가 엉킨 채 겨우 살아있었던 스타티필룸을 두 개의 화분에 옮겨심고, 얼마 전 ㅈㅇ가 선물한 작은 꽃화분을 좀더 넓은 화분에 옮겼다. 겨우내 잘 자라지 않던 군자란에 흙을 좀 더 덮어주고 나니, 8리터 짜리 흙 한 봉지가 바닥 났다. 다음 봄엔 이 식물들을 화분이 아닌 흙마당에 옮겨심을 수 있을까. 실내에서만 살아야하는 애완견들이 애처로운 것처럼 늘 집안에 놓여진 채, 좁은 화분에서만 살아야하는 화초들이 새삼 애처로와졌다. 아침 저녁으로 초록잎과 예쁜 꽃들을 보는 나는 좋지만, 식물들에겐 참 미안한 게 화초 키우기, 로구나.

 

오전에 공부하기,는 생각보다 지키기 어려운 실천인 듯. 아침 차려먹고 치우고 어쩌고 하면 오전 열시가 후딱 지난다. 가끔 졸려서 이른 낮잠을 자기도 하고, 메일 체크나 자질구레한 일들 몇 가지 처리하고 나면 점심 시간이 돼버리고. 강의가 있는 날엔 좀더 일찍 하루를 시작하긴 하지만, 강의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전에 맑은 정신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정리하고 자극이 되는 것들을 읽고 새 글을 써본지 정말 오래 된 거 같다.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요즘. 이상하게 음악을 듣는다거나 티비를 본다거나 하지 않는다. 지난 가을엔 아이패드 붙들고 페북이랑 트윗하느라 정신없었는데, 그것도 좀 시들. 생각해보면 바쁠 일 없는데, 종일 바쁘게 뭔가 하고 있는 듯 하다. 강의 준비하고 세미나 텍스트도 읽고 빨래도 하고 없는 솜씨로 반찬도 만들어보고. 예전엔 며칠 약속이 없으면 심심하고 허전했는데 요즘은 그냥 그렇게 하루가 잘 간다. 칠월 이후엔 집에 머무는 시간이 훨씬 길어지겠지. 그 때를 대비해 연습해두는 건가, 싶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 때가 되면 이 시간들을 집에서만 보내는 게 아쉬워질 거 같아 왠지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이젠 감추기 어려울 정도로 배가 많이 나왔다. 예전에 입던 바지나 스커트는 못입은지 오래됐고, 이제 외투들도 단추가 채워지지 않아서 열고 다닌다. 임산부 티나는 패션은 괜히 싫어서 요리조리 피했는데, 더이상은 임산부 아닌 척 하고 다니기 어려워진 거지. 배꼽 아래에만 있던 아기가 이제 명치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서 시도때도 없이 툭툭 태동을 한다. 두 개의 심장을 가진 다른 존재가 한 몸에 있는 기이한 시간들. 나도 잘 모르는 내 몸 안쪽 환경을 누구보다도 잘 즐기고 있을 이 존재가 신기하기도  낯설기도 하다. 낯설고 낯익은 이 시간들도 어느새 지나가버리겠지, 하고 생각하면 사무치게 소중해지곤 한다. 호르몬 때문인가, 요즘은 눈물도 곧잘 나온다. 그런데 슬프거나 서글프진 않고, 그냥 담담히 평화로와서 좋은 시간들.

 

<화차>도 보고싶고, 오늘은 문득 <파수꾼>이 보고싶어졌다. 극장 안간지 만년은 지난 듯. 크고 작은 해야할 일들을 해내면서도 슬슬 걸어다니고 극장도 가고 보고싶은 그녀들도 만나고 하면서, 느리게 봄을 보내고 싶다. 그런데 아, 소중하다 싶으니 시간이 참 빨리도 간다. 내 삶에 단 한 번 뿐일 올봄. 빨리 가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그냥 그렇게 가보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