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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논문을 위해 인터뷰를 해주신 N선생님을 뵙고 점심을 함께 먹었다. 지난 2년 사이, 선생님은 할머니가 되었고, 나는 예정일을 앞둔 만삭의 임산부가 되었다. 전문직 여성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지난 번과 달리, 우리는 아이를 낳는 일, 엄마가 되어 경험하는 것들 그리고 모성모호 정책에 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겸손하고 통찰력이 깊은, 감성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인 N 선생님. 나는 이런 여자 어른을 좋아하는구나, 이야기를 나누며 새삼 깨달았다.

식사를 거의 마칠 즈음, 문득, 선생님은 산고(産苦)의 순간에 아버지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다는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의 아버지는 큰 딸이었던 선생님의 결혼 즈음 암으로 돌아가셨다. 육체적 고통으로 힘들어하시는 아버지를 간호했던 선생님은, 아기를 낳는 그 순간에 아버지의 고통을 기억하며, 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고통 뒤에 죽음만 있었던 불치병에 비하면, 산고의 뒤엔 새 생명의 탄생이 있으니 정말 축복이다, 하면서 출산의 고통을 견뎠다고.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서도 가장 많이, 먼저 떠오른 사람은 아버지였다고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시선이 먼 곳에 잠시 머물렀다가 돌아왔다.

난 출산이 다가오니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실은 임신 기간 내내 엄마의 부재는 나를 기죽게도 하고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게도 하고 한편으로 더 씩씩하게 아이 엄마로 거듭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도 했다. 보통, 아이를 낳고 몸조리를 하는 기간이야말로 친정 엄마가 가장 필요한 시간이라고 여겨지니까, 엄마가 안계신다는 걸 모르는 지인들은, 그래, 엄마가 언제부터 도움을 주시냐고들 물어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부재를 상기하는 것이 불편하고 마음이 아프다. 물론, 이미 나의 상황을 알고 마음으로 걱정하고 아껴주시는 분들도 많다. 작은 것 하나하나 챙겨주시는 그 마음들에서 엄마를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을 기다리는 이 시간, 내가 힘든 건, 엄마가 계셨다면, 임신 기간 내내 그리고 출산과 그 이후의 시간들동안 우리 둘이 참 많은 걸 나눌 수 있을텐데, 라는 아쉬움이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사랑했던 엄마는 참 많은 기쁨과 걱정과 두려움과 즐거움을 나의 임신, 출산을 기회로 나와 나누었을 것이다. 좋은 친구로, 선배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임신 중반기즈음이었나. 간만에 꿈에 엄마가 나왔다. 꿈 속의 엄마는 지혜롭고 현명한 모습으로 나에게 꽃반지를 주셨다. 여러 개 중 몇 개를 골라보라고 하시면서, 내 손가락에 끼인 반지를 참 이쁘다, 이거 너 가져라 하셨다. 내가 보기에도 반지가 참 예쁘고 마음에 들어서 아, 이쁘다 이쁘다 했다. 그렇게 반지를 낀 채로 잠에서 깼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히끄무레한 새벽이었다. 엄마 생각에 그날은 이른 새벽부터 잠에서 깨어 종일 기분이 좋았다. 엄마가 내 옆에 계셨다면, 그 꽃반지처럼 좋은 것, 이쁜 것만 나에게 주시고 싶어셨나보다, 했다.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안계시지만, 엄마의 그 마음이 나에게 전해지는 것이려니 하고 믿었다.

출산의 순간이 오면, 나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했다는 선생님처럼, 엄마 생각이 많이 날 것 같다. 어쩌면 감정에 휘말려 많이 울게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그 순간에, 엄마 생각을 하고 울고, 슬픔과 아쉬움 혹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내 몸과 마음을 가만히 두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의 막연한 믿음 중 하나는, 산고의 그 순간에 엄마가 나와 함께 하실 거라는 것. 삼십오년 전 초여름, 긴 산고를 거쳐 나를 낳아준 바로 그 여자가 내 곁에 와서 삼신 할매처럼,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도와줄 거라는 믿음. 터무니없지만, 그래서, 어느 날부턴가는 출산의 고통이 좀 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모든 아픔에는 끝이 있다. 아기를 낳는 고통도, 다른 고통들처럼, 왔다가 가겠지. 그와 동시에 어떤 아픔은 참 오래 간다. 예순을 바라보는 선생님의 마음 속에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그 이별의 고통이 있듯이. 나에게도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 헤어짐으로 받은 상처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남아있겠지. 그렇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그 고통만큼의 기쁨과 즐거움이 내 마음에 쌓일 것이다. 그 순간들마다 또 엄마 생각이 날 것 같다. 그 때마다 나는 다만 그리워하고 아파할 것이다. N 선생님의 그 아득한 시선처럼 때로 쓸쓸해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