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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에 둘이서 몰래 캄캄한 노천 욕탕에 들어갔다.

울창한 숲의 향이 낮보다 한층 짙게 풍겼다.

세찬 강물 소리가 어둠을 헤치고 흐르고 있었다.

삼나무와 대나무 숲을, 뽀얀 달이 비추고 있었다.

뜨거운 탕에서 피어오르는 김에, 모든 것이 환상적으로 번져 있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몸이 불어 쭈글쭈글 해졌을 즈음, 어둠에 눈이 익어 별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눈앞 대나무 숲에서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가늘고, 하얗게, 이쪽을 보고 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었던가.

"나는 보이지 않아. 하지만 느껴. 저 네번째 키 큰 대나무 언저리에."

하치가 말했다.

".......<엄마>다."

나는 말했다.

"그렇군. 배웅하러 온거야. 하코네에서 죽었으니까."

"아직 이승에서 떠돈단 말이야?"

"그런게 아니고, 그냥 나를 만나러 왔겠지."

하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깨끗하고, 맑은 기운이니까"

나는 알몸으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분명 거기에 그 사람이 있다. 

너무 멀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어둠에 퍼져 꺼져버릴 듯하지만, 그 영상은 영화처럼 마음에 새겨졌다. 

우뚝 솟은 새카만 대나무 그림자에, 보일 듯 말 듯 조그만 몸의 강렬한, 눈부실 정도의 하양. 

천천히 손을 흔드는 동작이 흐르는 잔상이 되어 신선한 숲의 향과 함께 밤 속으로 녹아들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지도 않았다.


- 요시모토 바나나(1999), <하치의 마지막 연인>, 민음사, pp.119-121


2006년 1월 6일, 나는 이 책의 이 구절을 이렇게 기록했다, 내 블로그에. 그리고 밤의 노천 욕탕에 가보고 싶다, 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반년 전쯤 부음을 들었던, 친구가 그리웠던 것 같다. 그리고 2009년 1월에는 블로그의 이 글 밑에다 지금은 더 간절하게 이 장면이 나에게도 일어나길 바란다,고 댓글을 달았다. 그리고 지금은 2014년 2월. 시간이 어느새 이렇게 흘러버렸네.


얼마전 설명절에 남원의 어느 찜질방에 갔다가, 우연히 혼자 노천 욕탕에 있게 되었다. 밤이 깊지도 않았고, 대나무 숲은 엉성했고, 물도 뜨겁지 않았지만. 나는 혼자 차가운 겨울 저녁 바람 속에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느낌은 아니었지만, 만약 엄마가 나를 만난다면, 이런 순간이지 싶었다. 맑고 깨끗한 기운으로, 내가 가장 평화로운 마음일 때.


고통은 오지 않는 편이 좋다. 그렇지만 이왕에 온 고통은 시간을 보내며 나에게 자욱을 남긴다. 그 자욱들이 내 인생이고, 나이고, 나의 우주겠지. 문득 상처 자욱이 적지 않은 나, 내 인생, 내 우주가 마음에 든다. 아파도 그리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