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그런데 어느 저녁 아무 예고 없이,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아무리 오라고 해도 안 오던 우리 집에... 나 혼자 있는 신혼집에 찾아오신 거야. 정말 갑작스러웠어. (중략)

 

할아버지는 나를 보자마자, 이제 충분히 고생했다, 넌 이런 데서 혼자 있어야할 아이가 아니다, 집으로 가자, 내가 데리러 왔다, 하시는 거야. 나는 그럴 수 없다 싶었지만, 일단 들어오시라 했어.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여기는 네 집이 아니니까 나는 들어갈 수 없다, 기다릴테니까 어서 준비하고 나와라, 하면서 현관 마루 끝에 앉으시는 거야. (중략)

 

나는 친정에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 시점에서 내 집은 거기밖에 없었으니까. 옛날에는 시집갈 때 그런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으니, 그 결심을 쉬이 포기할 수 없었던 거야.

 

그런데 그 때, 모든 게 갑자기 변하는 순간이 찾아왔어. 물을 끓이면서 난감한 마음에 할아버지가 어쩌고 있나 싶어 문득 복도 끝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코트도 벗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은 채 꼼짝 않고 마루 끝에 앉아있는 할아버지가 보이는 거야. 호텔이 출근할 때 늘 입는 검고 묵직한 단벌 캐시미어 코트였어.

 

할아버지는 현관 쪽을 보고 앉아있었어. 그리고 할아버지의 코트 자락은 현관에 놓여있는 남편의 구두 위에 늘어져 있었지.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으려고, 마치 남편이 있는 것처럼 매일 반짝반짝 닦아서 가지런히 놓아 두던 구두 위에 말이야. 순간적으로 나는 할아버지가 더럽혀진 듯한 기분이 들었어. 그리고 깨달았지. 내가 오기로 이 집을 지키고 있을 뿐 남편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내가 지금, 할아버지의 코트 자락이 남편의 구두에 닿은 것을 아주 잠깐이지만 더럽게 여겼다는 것을. 물론 금방 그 느낌을 지우려 했다해도, 그것이 내 진정한 마음이라는 것을 말이지. (중략)

 

아무튼 나는 할아버지의 코트 자락이 남편의 구두에 닿은 것을 보고 절개 있고 위대한 우리 할아버지가 더럽혀지는 게 싫다고 생각했어. 그 뿐이었어. 그것만이 사실이었지. (중략)

 

난 바로 가스 불을 꺼 버렸어.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잠시 기다리시라고 하고서, 최소한의 짐을 꾸려 그 집을 영원히 떠난 거야. (중략)

 

마음을 굳혔기 때문에 난 전혀 흔들리지 않았어. 뭘 자랑스럽게 여기고, 뭘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지 내 안에서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137-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