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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논문 일기

0310, 木

새빨간꿈 2011. 3. 10. 15:24



1. 오전 내내 학교 오기 싫어서 집에서 낑낑. 결국, 오늘 점심 약속이 있다는 걸 11시 넘어서야 발견, 후다다닥 왔음. 긴 직장생활과 출산, 육아 후 학교로 돌아온 J언니와 밥 먹고 차 한 잔 사서 빈 연구실에 마주 앉아 질적 연구와 인터뷰, 구술생애사와 박사논문, 공부와 육아, 외모와 다이어트에 관해 한 시간 반동안 이야기이야기이야기. 학교를 이렇게 오~래 다니면서, 아직도 이렇게 좋은 사람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기회들이 있다는 거 분명 행운. 근데, '괴물'이 안될려면 남 이야기 많이 들어야지, 하고 어제 다짐했는데, 오늘도 내 얘기만 좀 많이 한 것 같기는 하고.

2. 체중이 적게 나가고 헤어스타일이며 옷이며 이쁘게 하고다녔던 시절엔 회사생활 포함 일상이 훨씬 편하고 좋았다는 J 언니의 회상. 예컨대 거래처에 가서 비슷한 내용의 pt를 해도 살쪘을 때와 아닐 때의 분위기와 반응이 아주 달랐다고. 그 얘기 들으며 난 외모로 그런 덕 본적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 좀 우스웠다. 꾸미고 다녀본 적도 별로 없고, 꾸며도 티 안나는 평면적인 얼굴과 굴곡없는 작은 몸이 다행인지 아닌지. 그리고, 다이어트에 목숨 걸고 성형을 감행하고 화장을 열심히 하는 여자들에 대한 내 깊은 반감이 좀 마음에 걸렸음. 몸이 자본인 세상, 나도 돌아보면, 혹 뚱뚱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원초적인 두려움을 안고 사는 걸.

3. (외모 이야기에 이어) 어제, 귓볼 위쪽에 구멍을 하나 더 뚫었다. 신체상해공포가 유달리 심한 나, 몇달을 망설이다가 갔는데, 이쁘고 키크고 날씬한 주얼리 가게 언니는, 일초도 안 걸려서, 무심하고 시크하게, 딱 뚫어주더군. 그 순간 아, 하고 아팠고, 한 시간 정도 귓볼이 후끈후끈. 가게를 나와서 오분동안, 멀쩡한 살을 뚫어서까지 멋을 내려는 건가, 하고 후회. 근데 그 후론 거울만 있으면 왼쪽 귀를 보고 또 보며 룰루랄라. 마흔 살 쯤엔, 내 몸에 (누가 봐도 딱 눈에 띠는) 타투 하나와 여섯 개 정도의 피어싱은 있어야된다,고 (난데없이) 다짐해왔는데. 이제 피어싱 두개랑, 타투 한개 남았네.ㅎ

4. 연구실에서 가까운 까페에 '차이 라떼' 메뉴가 생겼다! 간만에 마시니 인도에서 마셨던 '짜이'가 그리웠음. 춥고 습기 많은 겨울 북인도의 아침, 짜이 한 잔이면 몸도 마음도 노골노골 부드러워졌는데. 그 진한 향기, 뜨거운 차의 온도,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도시에 서 있던 나. 정말 오랫만에 여행이 고파졌다, miss India!

5. 어제 아침엔, 이천구년 인도여행을 같이 갔던 Song을 만났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 없는 eyagi 까페에서 얼그레이와 페퍼민트 티를 마시며 퍼머컬쳐, 민중교역, 교사교육, 농사 잘지어 자립하는 법, 3세계 교육개발을 이야기했다. 오는 일요일 아침 필리핀 민다나오로 떠나는 그는 앞으로 삼년간 거기서 교육과 농사를 통해 가난한 이들이 자립하는 법을 연구하고 연습할 계획이란다. 

너, 몇 살이지? 
서른!
야, 디게 좋은 시작이다, 이렇게 삼십대를 시작하다니!
(빙그레)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진짜 부럽다. 그리고 참 예쁘다, Song. 니가 거기서 열심히 살고 일할 거라는 믿음이 내 일상에 큰 힘이 될 거야, 고맙다.

6. 긴 편지를, 단숨에 써서, 휙, 보냈다. 전송 후 만 하루 - 이십사시간은 무척 가벼웠는데, 오늘은 내내 후회의 마음이. 내뱉은 말, 흘려버린 물, 보내버린 편지는 되담을 수 없는 법. 공은 이미 수신자에게 넘어갔으니 내가 해야할 일은 서서히 잊는 것. 

7. (내 오래된 구식) 핸드폰 바탕화면에 [난 언제 내가 좋은지] 라는 문장을 적어두었다. 대체 난 어떤 순간에 나 자신을 긍정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한 번 관찰해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