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때, 대구 가서 이모들을 만났는데, 우리들은 부엌 바닥에 앉아 한 목소리로 이런 넋두리를 했었다. "아, 일년은 지난 것 같이 길어. 이번 가을, 겨울은 너무 길어." 그 긴긴 시간들 동안 내가 제일 많이 했던 건, 돌아보니, 나를 혐오하는 일이었다. 자책과 후회, 뼈아픈 후회. 내가 그동안 자기 혐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걸, 인도에서 깨달았다, 걷고 절하고 명상하고 잘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순간순간들 덕분에. 인도에서 나는 잘 씻지도 않고 거울도 안보고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잤다, 그러면서도 많이 웃었다. 환하게 웃기,를 몇 달만에 다시 해봤다, 그리고 죄책감도 덜고 후회의 마음도 많이 버려두고 왔다. 자기 혐오의 다른 면은 타인의 인정을 구하는 욕망이다. 어리석고 못났고..
돌이켜보면, 결혼 준비를 하고, 결혼식을 '해내고', 신혼여행을 갔던, 이천육년 겨울에서 이천칠년 봄까지의 기간동안 나는 무척 우울했던 것 같다. 그 기간의 일기들, 사진들을 보면 결혼을 둘러싼 고민들 속에 파묻혀서, 그러나 어찌됐든 결혼이라는 걸 수행하고 있는 내가 발견된다. 그 기간의 우울에는 많은 설명들이 붙어야하겠지만, 커다란 괴로움 중 하나는, 나에게 의미있는 타자들이었던 페미니스트 친구들이 모두들 내 결혼을 '배신' 내지는 '전향'으로 여기고, '난 그 결혼에 반대요!' 혹은 '니가 왜 결혼을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시간이 지나고 내 결혼을 반대하던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만나게 된 지금에도, 그 친구들이 건네는 어떤 대사들, 예컨대 "넌 결..
1. 동거인과 나의 고향을 각각 2박 3일씩, 명절 여행을 다녀오니, 집은 꽁꽁 얼어있다, 보일러를 켜고 이불을 펴고 그 안에 누워도 한참동안 발이 차가워 꼬물대는. 명절 내내 박완서의 을 읽었다, 밑줄을 긋고 싶은 구절이 몇 군데. 일상으로 돌아와 해야할 일들을 적은 수첩의 한 페이지는 to do list로 가득한데 오전 내내 인터넷만 하고 있다. 간밤엔 인도로 떠난다는 ㅇㄴ와 통화했고, 좀전엔 내달 초에 수술을 한다는 ㅅㄴ과 통화를 했다, 그러면서 그녀들과 이어진 가늘고 질긴 인연에 새삼스럽고 이상한 감사함을 느낀다. 깔끔하게 정리돼있던 책상이 어지럽혀지고, 방학은 한달 남았고, 시간은 간다. 2. 인도에 다녀와서 식탐이 늘었다, 이런 내가 재미있어서 내내 지켜보았다, 늘어난 식탐으로 살이 찌거나 소..
어느 문닫은 상점 길게 늘어진 카페트 갑자기 내게 말을 거네. 난 중동의 소녀 방안에 갇힌 14살 하루 1달러를 버는 난 푸른빛 커피 향을 자세히 맡으니 익숙한 땀 흙의 냄새 난 아프리카의 신 열매의 주인 땅의 주인 문득, 어제 산 외투 내 가슴팍에 기대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네. 내 말 좀 들어 달라고 난 사람이었네. 어느날 문득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난 사람이었네. 공장 속에서 이 옷이 되어 팔려왔지만 자본이란 이름에 세계라는 이름에 정의라는 이름에 개발이라는 이름에 세련된 너의 폭력 세련된 너의 착취 세련된 너의 전쟁 세련된 너의 파괴 붉게 화려한 루비 벌거벗은 청년이 되어 돌처럼 굳은 손을 내밀며 내 빈 가슴 좀 보라고 난 심장이었네. 탄광 속에서 반지가 되어 팔려왔지만 난 심장이었네. 어느날 ..
몇날 며칠 잠도 밥도 제대로가 아니던 그 몇주동안에는 이상하게 감기도 들지 않았다. 그러고는 어제 덜컥 목감기가 왔다, 침을 삼키면 아프고, 열이 나는. 토요일 저녁인데 동거인은 밤외출 중이고 몸은 아프고 저녁은 라면으로 대충 떼웠는데도, 이상하게 씩씩한 기분이 든다, 예전부터 내 속 깊은 곳에 보관해두었던 에너지가 퐁퐁. 논문은 점점 더 발전시키면 되고 마음 속 크고 검은 구멍도 그 자체로 익숙해질 거다. 아프면 앓고 슬프면 울고 지치면 쉬고. 다만, 지금 필요한 건, 크고 달고 시원한 사과 한알과 눈알 나오게 재미있는 드라마나 영화 한편 정도.
"그럼 과 사이의 주지훈의 마음 상태는 어떤 것이었나?" "그걸 지금에서야 깨닫는데 적응을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연기자가 되고, 드라마가 잘되고, 이런 변화들에 대해 적응을 너무 못했던 거다. 이제야 깨닫는 걸 보면 적응하는 데 3년 걸린 셈이다. 워낙 남의 이목을 신경쓰지 않는 성격인데도 어쩔 수 없더라. 말 많은 이쪽 세계가 어린 나한테 굉장히 상처였던 것 같다. 그 때문에 내 내면이 굉장히 어두웠고 도대체 누구의 기준으로 사람의 착함과 그렇지 않음을 나눠야 하는지, 무엇이 선과 악인지 심하게 고민했다. 그럴 때 을 선택했고 그 작품이 끝난 다음,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 고민이 풀렸다. 를 선택할 무렵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상처를 가졌지만 겉으로는 잘 알 수 ..
나에겐 꽤 오래된 (공개하기 싫은) 습관이 하나 있는데, 그건 생리 직전 우울을 인터넷 쇼핑으로 푸는 거다. 나름 소박한 삶을 지향하며 생활의 여러 방면에서 돈 아끼기를 제법 잘하는 나임에도, 3-5만원 가량의 (동거인의 표현을 빌자면) '저질 의류'를 사재끼는 것으로 생리 직전의 우울감을 풀어버리는 쾌감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이 시기의 쇼핑은 거의 대부분 매우 충동적이어서, 결재할 때는 닳아없어질 때까지 입을 수 있는 실용 아이템이라 굳건히 믿어의심치 않지만, 막상 배송을 받아 입어보고서는 아, 이거 어디 입고 나가지... 하면서 난감해하곤 한다. 이번 달 아이템은 쨔잔~ '올인원'이다. 어제 거울 앞에서 입어보았더니 이거 왠일인지, 너무나 흡족한 것이었다. 꽤 과감한 아이템이라 생각하면서도..
12월의 첫날인 어젠, 지난달 기고했던 학술지 편집위로부터 '게재불가' 판정을 받았다. 12월의 둘째날인 오늘, 논문계획서 도장 받으러 지도교수 연구실에 갔다가 주제를 엎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어젯밤-오늘새벽, 글쓰기가 이렇게 괴로운 거였군, 새삼 깨달으며 채운 에이포 아홉장은 과거에 묻고, 다시 새 글을 쓰고 있다, 눈도 손도 발도 다 부었고, 어깨는 굳어가네. 꽤 하드보일드하다, 겨울의 시작. 그런데 이런 식의 고난은 견딜만 하다, 아니 즐길만 하다. 타박타박 한 발씩만 뛰어도 언젠간 퓌니쉬 라인에 도착하는 마라톤처럼, 부지런히 자판을 두들겨 한자씩, 정직하게 쓰기만 하면 되니깐. 노트북이 뻑가거나 내가 쓰러지지만 않으면 내일 새벽쯤엔 또 어설픈 글 하나는 완성될테니깐.
요즘, 잠이 잘 안온다. 불끄고 눕는 그 시간이 두려워질 정도. 오늘은 그냥 일어나 앉았다. 이러다 지치면 자겠지 싶어서. 그런데 갑자기 비가 후두둑 내리는 소리가 들리네. 좋다. 이렇게 깨어있으니 선물같은 새벽비가 갑자기 내려주는구나. 나는 비를 별로 안좋아한다, 잠깐은 괜찮아도 이틀넘어 오는 비는 몸도 기분도 쳐지게 해서 싫다. 거기가 여행지이든 일상의 공간이든, 춥든 덥든, 짱짱하게 해뜬 날씨를 나는 훨씬 더 좋아한다. 그래도 비오는 게 좋을 때가 있다면, 바로 이럴 때이다. 밤은 아직 머물러있고 방안은 따뜻하고, 아마도 창밖은 차갑디차가울 이즈음부터의 밤비. 창너머로 들리는 빗소리가 여기, 방안에 있는 나의 안온을 확인시켜주는 것 같아서. 지금-여기의 내 안위를 구태여 창밖의 빗소리로 확인받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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