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엄청 추워진 날, 이사 중. 구년 전 늦가을 이 동네로 이사 오던 때가 떠오른다. 낯이 설은 동네에서 새 직장으로 출근을 시작했던 그 가을과 겨울의 날들. 이제 돌아보니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렸네. 살면서 제일 열심히 일하고 가장 많이 울고 제일 뜨겁게 사랑했던 날들이 이 동네 구석구석에 묻어있다. 세무대 운동장과 풀밭과 나무들, 정자 주변의 숲과 벤치와 내리막길, 광교산 호수와 둘렛길과 플라타너스 공원, 파장동 골목 구석구석, 위트러스트 까페와 목욕탕과 놀이터, 조원동에서 파장동까지 이어지는 언덕길, 광교산 산길과 산 아래 식당들... 걷고 자전거 타고 때로 뛰어다니며 누볐던 이 동네의 내 장소들. 아이가 돌을 갓 넘겼을 때 와서 이제 열 한 살 소년이 되는 시간동안 무탈하게 자랄 수 있는 품..
말도 안되게 빡빡한 일정들이 폭풍처럼 지나가고 집에 가서 쉬어야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쇼핑몰에 왔다. 사야할 물건들을 가장 효율적인 동선으로 후다닥 구입했다. 근데 집에 가는 게 괜히 망설여져서 쇼핑몰 안 까페에서 미숫가루 한 잔 시켜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졸음이 몰려온다. 입장과 관점이 다른 동료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모르겠다거나 얼마나 비싼 물건은 마음 편히 사도 되는지 헷갈린다거나 사이사이 주어진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하는지 알 수 없다거나 하는, 아직도 이런 것들을 모르고 있구나 싶어 스스로 한심하지만 여전히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들에 관해 조곤조곤 이야기 나누고 싶다. 더 정확하게는 이런 걸 모르는 나를 판단하거나 타박하지 않고, 이런 사소한 건 별 문제 아니라는 식으로 대하지 않는 누군가와 ..
쎄게 아프다. 심하게 체해서 며칠 째 골골. 죽 먹고 약 먹고 자고 일어나는 걸 반복하며 속상하고 우울한 날들.
분명 제주현대미술관을 검색해서 갔는데 네비게이션이 목적지로 알려준 곳은 김창열미술관 주차장이었다. 제주현대미술관까지는 400미터 거리. 왜 여기로 나를 안내했지 싶었지만 날도 좋고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천천히 걸었다. 낮은 돌담들과 나무들 꽃들이 볕과 바람 속에 가장 예쁜 모습으로 놓여있던 길. 그 길 걸으며 참 좋았다. 네비게이션이 나를 위해 걷는 시간을 준 것처럼. 언제나 목적지까지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로만 갈 필요는 없지. 둘러갈 때도 있고 헛짓 하며 엉뚱한 곳을 들러 갈 수밖에 없는 순간들도 있지만 그것도 그 나름으로 참 좋을 수 있다는 걸, 그 길을 걸으며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이번 여행 자체가 그랬네. 항공권을 뒤늦게 예매하는 바람에 처음부터 허둥지둥이었지만 충만한 시간들..
차 안에 앉아 빗소리를 듣는다. 타닥타닥 차 천정과 빗방울이 만나는 소리. 아득하고 낭만적인 저 소리.
해 지는 걸 보고싶어서 저녁상 대충 치워놓고 나왔는데 오늘 저녁 하늘은 구름이 가득. 서쪽 하늘이 오렌지 빛으로 조금 물들고 구름이 천천히 흘러간다. 아파트 단지 안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고 스탠드 계단에 앉으니 아직 낮의 열기가 남아있네. 아버지가 가시고 나서 아쉬운 것은 한 번도 그의 마음을 찬찬히 물어본 적이 없다는 거. 둘이 마주 앉아 조용히 이야기 나눌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그보다 난 두려웠던 것 같다. 그가 이야기할 그의 마음이 나를 아프게 할까봐. 내가 바라던 사랑과 관심이 그의 마음에 한 톨도 없을까봐. 이제 그는 없고 난 영원히 그로부터 상처조차 받을 수 없다. 이젠 나에게 소중한 사람의 마음은 용기 내어 들어보려고 한다. 설사 그게 상처를 줄 말이라 해도 그걸 소화시켜 내 마음에..
오랫동안 내가 너무 보잘 것 없이 여겨져서 타인이 나를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때, 혹은 보잘 것 없는 나도 괜찮다고 수용해줄 때, 비로소 안심이 되곤 했다. 나는 연구를 잘 못해도 괜찮은 나인가요. 나는 집안일을 잘 못해도 괜찮은 나인가요. 나는 성격이 모나도 괜찮은 나인가요. 그런데 저 질문에 대한 답이 부정형이 될까봐 두려워서 질문 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완전히 무너질 순간이 되어서야 묻곤 했던 저 문장들에 대해 다행히도 긍정 답을 많이 얻었다. 그게 힘이 되었을까. 이젠 조금은 거울처럼 나를 비춰주는 답이 없어도 많이 불안하지 않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알게되어서랄까. 그러고보면 나의 저 이상한 질문들에 예스,를 외쳐준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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