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분쯤 요가를 하고 나니 몸이 더워져, 잠깐 나가서 좀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잠들었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숙소 불빛과 가로등이 있지만 밤의 숲은 어둡다. 서너 종류가 넘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물이 흘러가는 소리도 제법 크다. 바람이 살랑이는 게 기분 좋아서 입고 나갔던 얇은 점퍼를 벗었다. 몸으로 밤 숲의 기운이 스며드는 것 같은. 가만히 눈 감고 숲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밤 하늘을 본다. 멀리 빛나는 별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분간하기 어려운 어두운 형체들. 조금 무섭기도, 조금 편안하기도. 그리고 밤 숲이 나를 안아주는 것 같은 느낌. 점심 먹고 들렀던 산골짜기 까페에서 만났던 여성 노인이 나에게 문득 물었던 그 문장이 생각난다. "여기까지 뭐하러 오셨어요?" 이 ..
오늘은 아이 학교 개학날. 이번 여름방학을 돌아보니 내겐 참 힘든 계절이었다. 많이 우울했고 더위 때문에 몸이 많이 힘들었고 많이많이 울었던. 그 와중에도 계절수업을 해내고 매일매일 아이 끼니를 열심히 챙겨먹였다. 찬이래 봤자 콩나물 무침이나 미역국, 호박전이나 카레라이스, 김칫국과 쇠고기국, 계란찜과 오이냉채 같은... 흔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지만 언제나 정성 들여 만들어 먹이려 애썼다. 반찬을 만들고 상을 차리면서 머리로 하는 일에서 해방된 순간을 즐기기도 했고 손끝으로 완성되어 다시 몸으로 들어가는 음식 하고 먹기 과정을 처음으로 신기하다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담주면 나도 새학기를 시작하고 가을 내내 수업과 연구, 다른 과업들로 정신없을 것 같지만. 정성 다해 반찬 만들어 먹이고 소박한 밥..
나 혼자 강의 준비해서 교실에 들어가 학생들을 만나고 수업을 하는 것 같지만 내가 수업 하나를 하기까지 수많은 존재의 도움과 돌봄을 받는다. 그간 이론을 축적하고 논문과 책을 발간해온 선후배 동학들의 수고는 말할 것도 없고 강의실을 배정하고 수업할 수 있도록 해준 교무처 직원들과 시기마다 교수자가 해야할 일을 일러주는 조교 선생님들까지. 무엇보다 큰 도움과 돌봄의 주체는 사실 학생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저 수업을 들으러 오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살피고 도우며 강의를 하는 나를 돌봐주기도 한다. 일체중생과 천지만물의 은혜 속에서 살아간다는 원리는 수업에서도 마찬가지. 누군가의 돌봄노동 없이는 한 순간도 지내기 어렵다는 돌봄이론이 수업을 준비하고 굴려가는 일에도 찰떡처럼 적용되는 것. 그러니 언제나 감사..
살짝 불린 미역과 국거리로 잘게 썰은 쇠고기를 냄비에 넣고 국간장과 참기름 조금씩 부어 달달달달 볶으면 미역국 만들기의 반은 끝난다. 미역과 고기가 반쯤 익었을 때 조금 넉넉히 물을 부어주고 팔팔 끓이다 간을 보고나면 미역국은 완성된다. 어제 잠을 잘 못자 오전 내내 피곤했는데. 점심으로 보글보글 끓여 국물이 잘 우러나온 미역국 한 그릇에 밥 말아 김치랑 먹고 나니 땀이 훅 나면서 배가 든든해지고 마음에도 배짱이 생긴 것 같다. 그러고보니 며칠만에 제대로 먹었다는 느낌. 대단하고 놀라운 미역국 한 그릇의 효용.
아무래도 오늘밤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기차표를 끊고 택시를 불러 역으로 향할 때만 해도 눈물이 나오진 않았던 것 같다. 기차역에 도착해 동생이랑 한 번 더 통화를 하고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면서 참을 수 없이 울음이 터져 엉엉 울었다.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아마 있었다 해도 주저하지 않았을 거다. 그 밤 플랫폼에 서서 한참 흐느끼며 울었던 나는 두려웠던 것 같다. 아버지의 생명이 점점 꺼져가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가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무서웠다. 어린 시절을 제외하면 그에게 의지하며 살았던 적도, 그를 좋아했던 적도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도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스러져 사라진다는 것이 두려웠다. 마흔 일곱살에서 갑자기 일곱살 아이가 된 것처럼 그 상황이..
몸도 마음도 지쳐 떠난 여행. 그래도 위로받고 힘을 얻은 순간들이 있었다. 먹고 놀기만 한 이박삼일 동안에도 너무 피곤해서 힘들었는데.. 일정 끝무렵엔 신기하게도 내내 떠나지 않던 두통이 사라져있었다. 내 어린 시절을 공유하는 유일한 사람. 내가 경험한 아픔과 고통을 가장 유사하게 겪었을 인간. 그러면서도 나와 너무 다르고 완전히 별개인 존재. 동생이 잘 살아주어서 고맙고 앞으로도 내내 이렇게 잘 지내주길 기도하는 마음. 이렇게 멋진 곳으로 나와 함께 가주고 좋은 시간 함께 보내준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 간밤 잠들기 전,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 하고 소리내어 기도했는데. 지금 이대로의 나를 온전히 안아주며 또 하루 시작.
오늘 이 일터에 입사한지 1년 되는 날이었는데 신나게 기념하지 못하고 일에 치여 피곤해하며 보냈네. 이제야 오늘 할 일 마무리하고 노트북을 닫았다. 오후에 있었던 수업에서, 해방을 실천하는 것으로서의 수업에 관해 이야기 나누며 우리가 넘어야할 경계는 무엇인지 고민했다. 나로선 용기를 내어 나를 주눅들게 하고 수치심을 갖게 만들었던 내 정체성의 일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것을 교실에서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해방을 위한 실천이 될 수 있다는, 벨훅스의 논의에 대한 내 해석을 붙였다. 사실 나의 그 소수자성을 이야기할 때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는데 그걸 들켰을까봐 조마조마 했다. 학생 중 한 명이 나의 이야기에 고맙다고 응답했는데 나도 그들이 고마웠다. 나에게 안전한 공간이라는 감각이 이 교실에서 내가 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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