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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 RE-READ

더 리더,를 읽는다.

새빨간꿈 2009. 4. 19. 19:56

1.
오래된 친구 ㅇㅊ를 만나 <더 리더>를 봤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물론 봤다고, 그러나 여운은 이제 가셨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개인적인 어떤 부분과 공명하는 영화는 몇 년이 가도 여운이 남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는 영화 자체의 작품성과 별개로 그녀에게는 일주일도 채 못가 여운이 사라진다고. 그녀의 이 말은 내게 (그녀가 전혀 의도치 않았던) 이런 질문으로 들렸다. “이 영화의 어떤 면이 너의 삶과 공명하였기에 그렇게 오래 여운을 남기고 있느냐?”라고.  

2.
그 화창하던 봄 낮, 혼자 들어간 영화관에서, 그렇게 펑펑 울고 나오면서, 나는 이 영화를 본 다른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안달이 났다. 일주일인가를 지나서야, ㄹ와 ㅎㅃ과 만났을 때, 나는 참 간만에 흥분하여 영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영화 읽기가 그녀들 각자의 영화 읽기와 만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그 순간, 참 좋더라, 그러면서도 어떻게 나의 이야기만을 구분하여 이 영화에 관한 ‘내 글’을 쓸 수 있을까 살짝 고민도 됐다. 그러다 ㄹ가 올린 글(http://codutaci.tistory.com/trackback/146)을 보고서, 반가운 마음에 글을 써본다, 그녀의 이야기에 보태어/기대어, 그러면서, 혹은 그냥 나의 이야기.
 
3.
영화를 보고 나서 들었던 첫 번째 질문은 “한나는 왜 자살했을까?”였다. 물론 그 죽음은 그들이 다시 대면하고 돌아설 때, 예감되었다. 한나가 “잘가 꼬마야”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에게 그 인사는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감옥에서 글을 배우고, 아우슈비츠의 과거를 기억하냐는 마이클의 질문을 받고나서, 그녀는 역사적 과거라는 추상적 세계와 그 속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에 직면했던 것일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녀가 왜 죽었는지, 그 죽음이 돌연적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 죽음이 설명되지 않는다.
한나의 행동 중에서 납득이 안됐던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건 전차에서 마이클을 마주쳤을 때 불같이 화를 냈던 것이다. 나중에 왜 그렇게 화가 났냐고 애원하며 묻는 마이클에게 그녀는 왜 자신이 타고 있는 칸이 아닌 다른 칸에 탔느냐고 말하지만, 그 대답은 내 궁금증을 빗겨 지나갈 뿐이었다.

4.
영화를 본 후 생긴 두 번째 질문은 “한나는 왜 자신의 문맹을 그렇게 감추었을까?”하는 것이다. 직업을 잃게 된대도, 전쟁의 막바지 아우슈비츠의 감시원으로 일하게 된대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게 된대도, 무기징역 (혹은 그보다 더한) 벌을 받게 된대도, 그녀는 그 사실 하나, 자신이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감수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감추는 것만큼이나 그녀는 글과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세계 그리고 글을 읽고 쓸 수 있기 때문에 닿을 수 있는 세계를 동경한다. (이건 ㄹ의 지적이었는데) 마이클은 그녀의 몸을 보고 아름답다(beautiful)고 하지만, 그녀는 마이클이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말할 때 (그 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아름답다고 찬탄한다.
그녀에게 있어 자신의 문맹을 챙피하게 여기는 것(shame)과 문명에 대한 찬탄은 동전의 양면처럼 맞붙어 있다. ㄹ가 지적하듯이 그녀는 문명 이전의 세계, 야성적이고 야만적인 습성과 사고체계 안에 있었고 그 안에서 행동하고 말하고 선택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세계 안에 있으면서도 삶 내내 문명의 세계가 그 외부의 존재들에게 행하는 폭력을 마주하며 감수해왔던 것이다. shame은 단순히 부끄러워한다는 뜻을 넘어서 슬픔과 죄스러움을 동반하는 감정이다(shame: the feelings of sadness, embarrassment and guilt, 옥스퍼드 영어사전). 그녀의 죄책감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글을 쓰고 읽지 못한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문명의 폭력성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녀가 감옥에서 배운 것은 오직, (아우슈비츠의 죄책감이 아니라) 문맹의 죄책감을 벗어나는 방법, 즉 글을 읽고 쓰는 방법인 것이다. 

5.
만약 영화 속에서 그녀가 아우슈비츠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극복하고, 그래서 살아남았다면, 이 영화의 교훈은 그래, “무지한 여자들도 배우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훌륭하게도 이런 교훈 따위에 가둬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맹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그걸 가능하게 해준 (옛)연인을 만난 즉시 자살한다. 그녀가 문해자가 되어 죄책감을 벗고 말끔하게 연인을 마주했을 때, 여전히 그는 그녀가 죄책감 속에 있기를 강요한다. 아우슈비츠의 기억은 그녀로서는 기억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는데, 자기 삶의 핵심을 관통했(다고 글을 알게 되면서 나중에 믿게 되는)던 그는 아우슈비츠의 죄책감으로 그녀를 밀어넣으려고 한다. 이것은 법, 도덕, 역사(적 책임)이라는 이름의, 문명의 두 번째 폭력성이다. 글을 읽고 쓰는 방법은 다소 간단한 규칙을 통해 배울 수도 있는 것이지만, 법, 도덕, 역사는 그녀에게 이해할 수 없이 높고 큰 벽이다. 자신이 몸 구석구석을 씻겨주고 이제 그만 친구들과 놀아라,하고 보내주었던 꼬맹이가 문명의 ‘대표얼굴(ㄹ의 멋진 표현!)’이 되어 나타나더니, 이 높은 벽을 뛰어넘지 못한 그녀에게 벗어나기 어려운 중죄를 '선고’한 것이다. 그 벽 앞에 서서 한나는 마이클의 선고에 대한 대답으로 신발을 벗고 책상 위에 올라간다, (아마도 꾹꾹 눌러썼을) 짧은 편지를 그가 아닌 간수에게 남기고서.

6.
그래 맞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느낀 가장 큰 무게의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한나에 대한 연민도 있었지만, 그것은 죄책감의 또 다른 면이었을 것이다. 문맹-문해(illiteracy-literacy), 혹은 문명은 한 겹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글을 읽고 쓰는 문해는 가장 바깥 쪽에 있는 경계이지만, 그 안 쪽에서 수많은 literacy가 문명 세계 속의 삶들을 위계짓고 그 위계를 빌미로 폭력을 휘두른다. 나는 어디에 있고, 내가 이해하거나 납득하지 못했던 그/그녀들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 나는 돌아보았던 것 같다. 한나는 문명의 가장 바깥 경계를 넘어 드디어 문명의 세계로 들어왔지만, 그래서 글을 읽고 쓸 수 있기 때문에 만날 수 있는 추상적인 세계의 단맛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또 다른 문해의 벽에 부딪혔던 것은 아닐까. 그녀가 그 벽에 부딪히고 절망하는 데에 나는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7.
그녀는 한번도 그의 이름, 마이클을 부르지 않는다. 그녀가 꼬맹이라고 부르는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꼬맹이일 뿐이다. 감옥 바깥의 세상에서 그가 강요하는 죄책감과 도덕과 역사의 책임을 또 배우면서 그를 더 이상 꼬맹이라고 부를 수 없는 시간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를 딱, 꼬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순간에 그녀는 그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자존감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지킨 이 자존감은 문맹퇴치단체에 기부자로 그녀의 이름이 남음으로써 변색된다. 여러 겹을 가진 문명의 경계 바깥의 존재들, 문명의 언어를 잘 알지 못하고 그 언어로 설명되기 어려운 존재들, 특히 여자들은 그렇게 변색되거나 왜곡되거나 문명인들이 알기쉬운 형태로 기억되고 저장된다. 그래서 내게, 마이클이 그녀의 무덤 앞에 딸을 데리고 와서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자신의 언어로 묻는 마지막 장면은 불편하고 거북스러웠다.

8.
그렇다면 내게 남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그녀를 고스란히 이해하고 언어화하는 것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혹은 한나에게 어떤 언어를 돌려줄 수 있을지. 거창하게 말해보자면, 바로 이 질문이 내가 이 지긋지긋한 공부를 하는 것의 의미가 되는 건 아닐까.











* 영화의 몇 장면은 정말 대단하다, 그들이 소통하는 장면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그는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읽고 그녀는 허공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듣는다. 이 읽고 듣는 소통은 (야하다고 소문난) 섹스 장면보다 더 에로틱하다.














* 윈슬렛의 연기도 참 좋았다, 그녀가 등(back)으로 연기하는 하층민 여성의 삶과 눈과 입매로 표현한 절대적인 고독감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