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토 생활 백칠십삼일째 _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점심 때 안젤라를 만났는데 '이거 너 줄께' 하면서 이 티셔츠를 내민다. 지난 겨울(?) 여연에서 했던 콘서트 기념 티셔츠란다. 안젤라 친구 중에 덩치가 무지 큰 미국 남자애가 있는데, 저걸 입고 서울 지하철을 탔더니, 다들 쳐다보고 웃고... 그랬단다. 한글 모르는 나라에서는 입고다닐만 하겠지만, 저걸 서울에서 입고 돌아다닐 수 있을까 몰라.ㅋ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칭하는 안젤라는 요가 선생에 여성 인권 전문가, 한국 '위안부' 문제 관련 토론토 내 전문가(?)인데다가 채식주의자, 성인 교육 전공 석사다. 이번에 OISE 학생회 회장이 된 제프가 언젠가 표현했던 대로 엄청난 사회 자본을 가진 사람이다, 안젤라. 그녀와 베지테리언 '고급' 식당 ..
토론토 생활 백육십삼일째 _ 2010년 4월 30일 금요일 금요일 오후 학교는 늘 한가하다. 도서관들도 일찍 문을 닫고, 학생들도 잘 안뵌다. 오늘은 더 한가한 듯. 학기말 시험도 끝났고, 학생들의 계절은 벌써 여름 방학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덕분에, 한가한 교정을 거닐고 사람 없는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텅 빈 학교 수영장에서 운동했다. 좋다, 비어있음이 주는 여유. 그리고, 서울에선 거의 대부분의 공간이 늘 복작였던 걸 기억해내게 된다. 학교 수영장은 수심이 얕은 곳은 2.3미터, 깊은 곳은 4.5미터. 내 키보다 깊은 물에서 수영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여기 오면 괜히 긴장이 된다. 처음엔 허리에 매는 스펀지를 하고 떠 있다가 조금 지나면 그걸 벗고 입영을 연습한다. 다리로는 물을 차고, 팔로는 물..
토론토 생활 백오십삼일째 _ 2010년 4월 20일 화요일 토론토에 와서 지내는 지난 다섯달 동안 나는 편안하고 가볍지 않았다. 아주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니지만, 뭔가 불편하고 무거웠던 시간들. 그런데 내가 여기서 경험하고 있는 어떤 '불편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걸 잘 모르겠다. 때로 그건 영어를 잘 못하는 것에 대한 열등감이기도 하고, 가끔은 내가 현재의 지구 질서의 주변부 출신이라는 것에 대한 안도감 섞인 자조감이기도 하고, 이 질서와 권력 구조에 대한 분노나 억울함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로는 도무지 그려낼 수 없는 어떤 복잡한 심경들이 모종의 '불편함'을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서의 경험 어땠니? 너한테 좋았어?"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토론토 생활 백사십칠일째 _ 2010년 4월 14일 수요일 continuing education이 운영되는 OISE의 4층에서는 일년 내내 ESL 과정을 듣는 학생들로 붐빈다. 하루 4시간 12주 과정의 등록금은 4700불 정도. 적지 않은 돈이지만 소위 '좋은 대학'에서 운영하는 거라 좀 더 나은 교육 과정을 제공한다는 믿음을 주는 것 같다. 한국으로 치면 겨울 방학 기간인 1~2월에 보니, 이 과정을 듣는 한국 학생도 적지 않았다. 점심 시간에 OISE 1층 로비에 가보면 한국말로 떠드는, 대학생인 듯 보이는 애들이 제법 있다. OISE 뿐만 아니라, 토론토는 ESL의 도시라 할 수 있을 만큼, 대학에서 운영하는 영어 교육 과정들은 물론, 사설 영어 학원들도 많다. 오늘 들었던 CWSE 세미나에서 발..
토론토 생활 백십이일째 _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간만에 요가 교실 갔다. 강사 선생님이 하는 영어가 너무 잘 들린다. 다른 건 몰라도, 요가, 필라테스 선생님들이 말하는 영어는 진짜 잘 들린다(처음엔 이것도 잘 안들렸지만).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주고, 반복해서 말해주니까 영어에 익숙하지 않는 나 같은 강습생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거다. 어제 점심 땐,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건너편에 앉은 똘망하게 생긴 동양 여자애가 백인들이랑 연구와 관련된 토론을 '영어로' 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순간 드는 생각은, 아 부럽다, 나도 쟤처럼 저렇게 자유롭게 학문적인 논의를 영어로 해보고 싶다, 하는 거였다. 영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일 뿐, 그걸 유창하게 하는 걸 동경하는 건 영어가 가진 특권을 내면화한 ..
토론토 생활 구십칠일째 _ 2010년 2월 23일 화요일 종일 피곤했고, 공부도 잘 안되고, 마음도 복잡했던 하루. 케빈이랑 짧게 몇 마디 나누다가, 우연히, 복잡한 내 마음의 실마리를 봐'버렸다.' 여기 와서 내가 너그러워진 부분과 내가 포기한 부분에 대해서. 그동안은 너그러워진 부분만 봐온 듯. 포기와 관용은 한 끗 차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간단히만 쓰자면, 뭔가를 포기했다는 게 조금 괴롭다. 긴장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의 한 극단엔 냉소하고 포기하는 태도가 있는 듯. 그 중간 어디 즈음엔 스스로에게 너그러우면서도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있을텐데. 어떻든 여기 토론토에서의 나는 being minority 의 경험을 고되게 하는 중. 이 고됨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자고. 오늘은..
매일 일기를 쓰다보니 블로그에 일기 외에 다른 글을 잘 안올리게 된다. 일기는 보통 저녁 때 쓰거나 제목만 써놓고 미뤄뒀다가 나중에 쓰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그 때 느낀 그 감정과 생각보다는 좀 정리된 편인 것 같다. 여기 와서 저녁을 조금 많이 먹게 된다, 특히 외식을 하면. 음식 양이 좀 많이 나오는 편인데 보통 저녁 땐 시장한 경우가 많고 비싸니깐 아깝다하는 생각에 거의 다 먹기도 한다. 어제도 조금 많이 먹었나, 밤에 조금 뒤척였다, 그러면서 꿈도 여러편 꾸고. 가끔 그런 밤이 있다, 얼른 아침이 됐으면 좋겠는데, 아직이네, 하는. (반대로 그런 낮도 있지. 얼른 밤이 돼서 쉬었으면 좋겠다, 싶은) 간밤도 그런 밤이었는데, 뒤척이다 눈을 뜨니 아직 일곱시 전인데 환해온다. 해가 길어졌구나, 아직 추..
토론토 생활 칠십구일째 _ 2010년 2월 5일 금요일 _ 금요일 오후 운동 끝나고 씻고 나오면 체력이 완전 바닥난 기분이 든다. 일주일간의 피로가 어딘가 잠복해있다가 그 순간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 같은. _ 영어를 잘 못하는 나를 볼 때마다, 내가 한국어에 얼마나 능한지 알겠다. 한국어로 표현할 수 있는 그 세세한 감정들과 의미의 깊이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갈고 닦은 그 한국어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살기 위해서라도, 내 삶에 이민 같은 건 없을 듯.ㅎ _ 영법 중에는 물의 표면에 떠서 발장구 치고 손과 발로 물을 끌어당겨 얼른 앞으로 전진하는 방법들도 있지만, 물 속에 가만히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가를 반복하는, 몸의 긴장을 빼고 물에 나를 맡기는 잠영도 있다. 그러다가 깨닫기도 한다, 내 몸의 어느..
토론토 생활 칠십사일째 _ 2010년 1월 31일 일요일 오늘은, 어쩌다가, 라는 기부 행사에 자원 봉사 다녀왔다. 여기서 알게 된, 한국인 이민자 한 분이, 토론토에서 아이티 어린이를 돕는 행사가 있는데, 한국어 할 줄 아는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는 메일을 보냈길래, 선뜻, 한 번 해보겠다고 답장을 했던 것이 오늘 일의 시작이었다. 자원 봉사 가기 전에 사전 조사를 해봤더니, 이 행사는 토론토에 사는 다양한 인종과 언어의 사람들이 자신들 모국어로 편하게 아이티 어린이를 위해 기부할 수 있도록 토론토 방송국들과 핸드폰 회사인 벨(Bell)사, 각 국 출신의 이민자 단체 등이 함께 개최한 것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 케이블 방송으로 아이티 기부 호소 방송과 전화번호를 내보내면 각국의 언어가 가능한 ..
토론토 생활 칠십일일째 _ 2010년 1월 28일 목요일 수업이 끝난 목요일 오후 네시. 11층에 있는 강의실의 한쪽 면은 온통 남쪽으로 난 유리창이다. 이 도시의 남쪽엔 큰 호수가 있다. 오늘은 차고 맑은 날씨, 유리창 너머 도시의 남쪽 저 끄트머리에 반짝 하고 빛나는 호수의 한 자락이 보인다. 이 곳에 와서 가장 이쁜 도시 풍경이다. 열 명 남짓한 수강생들은 책가방과 외투를 챙겨 하나 둘 강의실을 빠져나가고 나는, 수업 시간에 몇 마디 못한 게 아쉬워서인지 선생님께 연구 방법론에 관한 질문 한 두 가지를 서툰 영어로 건넨다. 반쯤의 친절과 반쯤의 사무적인 태도를 갖춘 이 노교수는 다음 시간까지 너에게 도움 될 만한 것을 찾아와보겠노라고 신뢰로운 약속을 해준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하는데, 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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