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행의 마지막 날 밤, 간만에 뜨거운 물로 천천히 샤워를 하고 와인을 마시고 푹 잤다. 그 때 마신 와인 맛은 기억이 잘 안나는데, 그 피로감, 아쉬움, 그러면서도 느껴졌던 충만감 같은 것은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음날 아침, 부은 눈으로 일어나 분주하게 짐을 다시 싸고, 미련 때문에 긴여행 내내 들고 다니던 낡은 플랫슈즈를 버렸다, 기념 사진 한 장 찍고서. 그래서 Banff는 언젠가 다시 돌아가 새 신 한켤레 사야할 내 마음의 도시가 되었다. Jasper 공항으로 돌아가는 길, 날이 너무 짱짱하게 맑아서 괜히 심술이 났던 것 같기도. 언제 여기 다시 올 수 있을까. 모든 순간은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가버릴 뿐인데,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길고 넓은 길을 막막 달렸다. 꿈 같았던, 숲속에서의 시간들이 이..
돌아온지 두달 좀 넘었을 뿐인데, 그 곳에서 보냈던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까마득하게 멀다. 너무 추워서 몇 겹의 옷을 입고도 오들오들 떨기 십상이었던 겨울 날씨도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 그러니 여행 사진을 꺼내 볼 때마다 새삼스럽다. 아, 그 때 이런 곳을 다녔구나, 그 때 기분은 그랬었지, 날씨는 또 어떻고... 기억 속 깊은 저장고에서 온갖 감각들을 되살려내는 과정. 2월 중순, 한창 추울 때 나섰던 몬트리올. 퀘벡까지 가볼 껄, 차비도 그렇고 숙박비도 그렇고... 하면서 여기서 이틀을 묵는 걸로 만족했다. 사진 속의 거리는 구 몬트리올이다, 프랑스인들과 영국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했던 곳. 유럽식 건물과 거리들이 관광 포인트라고들 하던데, 한 마디로 꼬질꼬질하다. 흐린 겨울 날씨라 더 그랬는지도..
학교 다닐 때, 사범대 노래패 이름이 '길'이었다. 나는 인문대 노래패 소속이었지만, 우리가 노래도 잘하고 공연도 더 잘했지만, 나는 그 이름이 늘 부러웠다, 길. 뭔가 주장하거나 소리지르지 않고도, 그 과정만으로 아름다울 것 같았던 이름이라 여겼던 걸까. 대학을 졸업하고는 늘, 여행을 가고싶어 안달이었다. 일상의 막막함, 답답함, 숨막힘, 뭔가 아닌 것 같은 그 느낌을 벗어나는 좋은 방법, 그것은 일상을 떠나는 것, 그러나 안전하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방식으로 떠나는 것, 여행이었다. 그 바람 덕분에 여기저기 많이도 다녔다. 적은 돈으로 훌쩍 다녀올 좋은 기회가 종종 생기기도 했고, 시간만 나면 떠나고 싶어서 들썩거리다 보면 기회들이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여행을 떠난지 어느새 육개월이 훌쩍 넘었고,..
토론토 생활 백구일째 _ 2010년 3월 7일 일요일 돌아왔다. 이박삼일 예정으로 떠나선 칠박팔일만에 돌아왔다. 밤새 달려온 버스가 버팔로에 정차했을 때, 선잠을 자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 이제 집에 다왔네... 그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은 남부순환도로 낙성대 사거리 근처. 새벽녘의 그 거리는 차고 한적했다. 저 길을 따라 가면 봉천동 내 집에 다다른다, 뜨끈하게 보일러 켜 놓고 한 숨 더 자야지, 하다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지금 귀가 중인 '집'은 토론토의 내 방이구나, 하고. 열시간만에 버스는 토론토에 도착, 아침 9시부터 다니는 지하철 첫차를 기다리느라 다운타운의 브런치 식당에 가서 아침 식사. 사람 버글 거리는 대도시 뉴욕에서 여기 돌아오니 한산하고 조용하고 작고 익숙하다. 여기도 집이구..
토론토 생활 구십일일째 _ 2010년 2월 17일 수요일 아침에, 아직 여독이 안풀린 몸으로, 늦잠 자고 일어나니, 마음이 편하다. 그냥 편한 게 아니라, 편안하다. 집에 왔다,는 기분. 아침 지어 먹고 학교 갔다 귀가하니 다시 시작하는 일상의 싸이클이 반갑다. 이제 겨우 구십여일 지났는데, 어느새 여기가 '집'이 되었구나, 싶다. 학교에 앉아있는데 피곤해서인지 몸에서 열이 막 났다. 후딱 집에 들어와 쉬고 싶었는데, 그래도 견뎠다, 그러다보니 보려고 했던 아티클 한 편 다보고, 저녁도 먹고 장도 봐서 집에 오니 조금 멀쩡해졌다. 불교에선 집을 갖지 말고 유행(遊行)하라,고 한다. 내가 해석하기론 목숨이나 음식, 잠, 관계에 대한 욕망 만큼이나 질기고 강한 게 내가 사는 '집'에 대한 욕망인 것 같다. ..
토론토 생활 팔십팔일째 _ 2010년 2월 14일 일요일 6시간 반쯤 버스를 타고 왔다, 몬트리올. 흩날리는 눈송이가 나를 반긴다, 나도 반가워! 토론토에도 여행 와있으면서, 짐싸고 집을 나서는데, 여행 간다는 생각에 조금, 들뜬다.ㅎ 여긴 토론토랑 분위기 완전 다르다. 무엇보다, 수퍼에 가면 맥주를 살 수 있다! 건물도 집도 지하철역도 파리를 닮았다. 사람들은 모두 불어만 쓴다. 재밌다! YWCA 호스텔에 왔는데 숙소도 괜찮구먼. 내일은 구 몬트리올 지역을 슬슬 돌아다녀볼 예정. 월요일은 박물관이 모두 휴관이라 시내 구경만 해야겠다. 버스 안에선 논문이며 수업 준비며 걱정걱정 했는데 막상 도착하니 휴가 모드 발동, 히히 좋고나. 오늘도 아침기도만.
토론토 생활 이십일일째 _ 2009년 12월 9일 수요일 이십대 땐, 늘 여행을 떠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엉덩이가 들썩들썩, 돈만 있으면, 시간만 있으면 어디든 떠나고 싶어 안달이었다. 서른살을 조금 더 지나고 나니 그 '떠나고싶음'이 실은, 일상과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란 걸 알겠더라. 돌아오면 다시 그 자리인 나,를 여러 번 발견하고나서야 얻은 깨달음. 최근엔, 이십대 때와 반대로, 집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내 마음을 발견하곤 했는데, 그러니까 이번 토론토행은 사실, 일종의 도전인 거다. 일상에서 도망치지 말고 거기 뿌리 박고 살아보자는 마음이 치우쳐, 한 곳에 내 마음의 집을 짓고 거기다 식물도 키우고 내 물건도 정리해두고 나한테 딱 최적화된 공간으로 구석구석을 만들어갔던 것 같다. 그랬..
이천 육년 이월, 어느 추운 날. 그 때 나는 씨스터들로부터 뭔가 에너지를 얻고 싶었던 거 같다. 주변의 몇몇 여자들에게 '떠나자' 제안했더니 딱 두명이 낚였다. 그래서 그 여자들이랑 히히덕 거리면서 떠났다, 돈 몇 푼이랑 바다를 보고싶다는 마음, 그리고 목적지에 대한 알량한 정보 내지는 환상 같은 걸 가지고서. 서울에서 동해가는 버스를 타고 강릉에 도착 - 예약해둔 렌트카를 몰고 바람부는 동해 바다와 경포대 구경을 하고, 차를 달려 묵호항에 도착 - 저녁이 내리는 항구에서 오징어, 쥐포 등등 사고, 회도 한 접시 먹은 후 추암으로 이동 - 화장실도 없는, 미닫이 문을 열면 바로 바다가 보이는 민박집에서 파도소리 밤새 들으며 수다 떨다 자는 듯 마는 듯 밤을 보내고, 아침에 망상으로 이동 - 망상 바닷가..
- Total
- Today
- Yesterday
- 영어
- Kensington Market
- 맥주
- CWSE
- 박완서
- 일기
- 기억
- 엄마
- 일다
- OISE
- 봄비
- 켄싱턴 마켓
- 아침
- 교육대학교
- 감기
- 교육사회학
- 토론토의 겨울
- 열등감
- 토론토
- 선련사
- 봄
- 졸업
- 일상
- 가을
- Toronto
- UofT
- 논문
- 인터뷰
- 여행
- 인도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