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제주현대미술관을 검색해서 갔는데 네비게이션이 목적지로 알려준 곳은 김창열미술관 주차장이었다. 제주현대미술관까지는 400미터 거리. 왜 여기로 나를 안내했지 싶었지만 날도 좋고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천천히 걸었다. 낮은 돌담들과 나무들 꽃들이 볕과 바람 속에 가장 예쁜 모습으로 놓여있던 길. 그 길 걸으며 참 좋았다. 네비게이션이 나를 위해 걷는 시간을 준 것처럼. 언제나 목적지까지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로만 갈 필요는 없지. 둘러갈 때도 있고 헛짓 하며 엉뚱한 곳을 들러 갈 수밖에 없는 순간들도 있지만 그것도 그 나름으로 참 좋을 수 있다는 걸, 그 길을 걸으며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이번 여행 자체가 그랬네. 항공권을 뒤늦게 예매하는 바람에 처음부터 허둥지둥이었지만 충만한 시간들..
20분쯤 요가를 하고 나니 몸이 더워져, 잠깐 나가서 좀 걸었다. 다른 사람들이 잠들었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숙소 불빛과 가로등이 있지만 밤의 숲은 어둡다. 서너 종류가 넘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물이 흘러가는 소리도 제법 크다. 바람이 살랑이는 게 기분 좋아서 입고 나갔던 얇은 점퍼를 벗었다. 몸으로 밤 숲의 기운이 스며드는 것 같은. 가만히 눈 감고 숲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밤 하늘을 본다. 멀리 빛나는 별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분간하기 어려운 어두운 형체들. 조금 무섭기도, 조금 편안하기도. 그리고 밤 숲이 나를 안아주는 것 같은 느낌. 점심 먹고 들렀던 산골짜기 까페에서 만났던 여성 노인이 나에게 문득 물었던 그 문장이 생각난다. "여기까지 뭐하러 오셨어요?" 이 ..
몸도 마음도 지쳐 떠난 여행. 그래도 위로받고 힘을 얻은 순간들이 있었다. 먹고 놀기만 한 이박삼일 동안에도 너무 피곤해서 힘들었는데.. 일정 끝무렵엔 신기하게도 내내 떠나지 않던 두통이 사라져있었다. 내 어린 시절을 공유하는 유일한 사람. 내가 경험한 아픔과 고통을 가장 유사하게 겪었을 인간. 그러면서도 나와 너무 다르고 완전히 별개인 존재. 동생이 잘 살아주어서 고맙고 앞으로도 내내 이렇게 잘 지내주길 기도하는 마음. 이렇게 멋진 곳으로 나와 함께 가주고 좋은 시간 함께 보내준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 간밤 잠들기 전, 지금 이대로 좋습니다, 하고 소리내어 기도했는데. 지금 이대로의 나를 온전히 안아주며 또 하루 시작.
경포대 근처 두부집에서 순두부 찌개를 먹고 동네 작은 빵집에서 저녁과 아침으로 먹을 빵을 산 뒤 숙소가 있는 양양으로 향했다. 해안도로로 접어들자 오른쪽에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는데 바람 때문인지 파도가 거셌다. 기사문 항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바닷가에 차를 세우고 파도와 바닷바람을 혼자 실컷 느꼈다. 차갑고 거침없던 바람과 파도소리. 마스크를 벗고 혼자 막막 웃다가 너무 추워서 차로 돌아와 숙소로 향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가는 혼자만의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태어나 처음이다. 가끔 혼자 길을 떠났어도 목적지에선 일행을 만나 함께 다녔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였던 적은 정말 처음이네. 마흔 일곱이 시작되는 즈음, 나에게 일어난 일. 당연히도 다 좋지만은 않았다. 여자 혼자라 변을 당하면 어쩌나 겁도 ..
언젠가 운전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제주 해안도로를 드라이브 하고싶다고 생각했었다. 면허를 따고 차를 사게될 날이 올 거라 예상치도 못했던 때였는데. 면허를 처음 땄을 때, 제주도 가서 운전하면 좋겠다 생각하며 설렜다. 이번 여행에서야 그 해안도로를 운전해 돌아다녔다. 숙소가 있었던 비자숲 근처에서 한동리 바닷가 옆길로 들어가 세화-평대-성산까지 이어지던 그 길. 왼편엔 푸른 바다가 있고 오른쪽엔 검은 돌과 검은 흙 밭이 있던. 간간이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고 파란 하늘이 멀리까지 펼쳐져있는. 보조석에 앉아있을 땐 경험하지 못했던 그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충분하진 않지만 거기엔 자유의 감각이 있었다. 내가 스스로 이 길을 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주는 자유. "자유란 편함이나 선택항목의 많음이 아..
종일 바람을 많이 맞아서 피곤한 저녁. 사진 속 햇살과 구름, 바다는 평온해보이지만 내내 바람이 무섭게 불었던 하루였다. 그래도 종일 많이 웃었다. 아침 비자림 산책도 좋았고 숙소까지 걸어오다가 만난 까페 커피도 참 맛있었다. 점심 전복죽, 시흥리 바닷가, 파장 중이던 세화오일장, 한동리 바닷가, 잠깐 들른 ㅅㄴ언니네도 다 좋았다. 렌트카로 성산 평대 세화 한동을 잇는 해안도로를 운전하던 순간들, 숙소가 있는 비자림 근처까지 이어지던 나무터널 길도 멋졌고. 아이랑 둘이 여기저기 많이 다녔지만 둘이서만 이박삼일을 지내는 건 처음이고 이렇게 멀리 둘이 온 것도 처음이다. 여행계획 세울 땐 신이 났는데 막상 둘만의 여행이 시작되려하니 겁이 나고 긴장이 되었다. 특히 어제 저녁 낯설고 작고 허름한 숙소에 도착했..
- Total
- Today
- Yesterday
- 맥주
- CWSE
- 가을
- 열등감
- 토론토의 겨울
- 일기
- 여행
- 켄싱턴 마켓
- 감기
- 영어
- 기억
- 교육대학교
- 일상
- OISE
- 토론토
- 봄비
- 인도
- 아침
- UofT
- 논문
- 박완서
- 교육사회학
- 졸업
- 봄
- 엄마
- Toronto
- 인터뷰
- 선련사
- Kensington Market
- 일다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