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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생활 칠십일일째 _ 2010년 1월 28일 목요일


수업이 끝난 목요일 오후 네시. 11층에 있는 강의실의 한쪽 면은 온통 남쪽으로 난 유리창이다. 이 도시의 남쪽엔 큰 호수가 있다. 오늘은 차고 맑은 날씨, 유리창 너머 도시의 남쪽 저 끄트머리에 반짝 하고 빛나는 호수의 한 자락이 보인다. 이 곳에 와서 가장 이쁜 도시 풍경이다. 열 명 남짓한 수강생들은 책가방과 외투를 챙겨 하나 둘 강의실을 빠져나가고 나는, 수업 시간에 몇 마디 못한 게 아쉬워서인지 선생님께 연구 방법론에 관한 질문 한 두 가지를 서툰 영어로 건넨다. 반쯤의 친절과 반쯤의 사무적인 태도를 갖춘 이 노교수는 다음 시간까지 너에게 도움 될 만한 것을 찾아와보겠노라고 신뢰로운 약속을 해준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하는데, 한 마디 덧붙이는 그녀. "학생들 말이 너무 빠르지. 그래서 미안해." 나는 웃으며 그건 선생님이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는데, "학생들이 빠른 속도로 이야기할 때마다, 쪼금만 더 천천히 천천히... 이렇게 외치고 싶다니깐..." 다시 한 마디 더하는 선생님의 표정이 참 따뜻해서, 강의실을 나서는 내 얼굴에 미소가 맺힌다. 이렇게 네 번째 수업이 끝났다. 12주의 수업 중 삼분의 일이 지나가고 있다. 세어보니, 여기서 지낼 시간도 어느새 삼분의 일이 훌쩍 지나갔다.

ㅈㄹ학원에서 재수하던 시절, 내가 늘 연정을 품고 바라봤던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대학 와서 알고보니 그는 우리 과 선배였고, 격동의 80년대를 부끄럽게 견뎠던 문학도였다. 이 선생님은 가끔 재수생들을 앞에 두고 잘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하시곤 했는데, 두고 두고 기억에 남는 건 이거였다: "나중에 다시 이 시간을 돌아본다면, 이 순간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 같니?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느냐의 여부에 따라 좋았던 시절 혹은 후회스러운 시절로 기억하진 말길 바란다. 이 과정들을 그 자체로 기억하고 평가하기를 바래." 그후로 가끔 선생님의 이 이야기를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여기 와서도 가끔 생각이 난다. 나중에 이 시간을 다시 기억한다면, 나는 어떤 말들로 이 순간들을 설명하게 될까.

여기 도착한 첫날, 매일 일기를 쓰고 아침기도를 하고 영어 공부를 꾸준히 하고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길 다짐했는데. 아침기도 만큼이나 빼먹지 않고 쓰려고 했던 일기를, 어제 처음으로, 쓰다가 그냥 지워버렸다. 하루를 기억해서 뭔가 쓰는 것이 좀 힘들었다. 어제 하루 내내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했고, 조금쯤은, 그 부정적인 생각들이 반복된다는 것에 지치기도 했다. 영어는 여전히 잘 안되고 돈 쓸 때마다 통장 잔액을 신경 쓰고 날씨는 춥고 논문 진도는 느리고 감정이나 일상의 자잘한 느낌들을 나눌 친구는 별로 없는 생활이 계속 될까봐, 그러다가 덜컥 돌아가는 날이 되어버릴까봐 두려웠다고 할까. 그리고 나중에 이 시간들을 기억했을 때, "아 그땐 정말 힘들었어. 그런데 뭐 지나고 나니 그런 고생도 한 번 해볼만 한 것 같아"라고는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고 할까.

그런 마음들에 사로잡혀서 일기를 쓰다 지워버렸는데, 그래서 실은, 오히려, 순간의 느낌과 생각들을 잘 기록해둬야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어떻게 극복되었는지 무엇은 남아있고 어떤 것은 가벼워졌는지 누구에게서 어떤 영감을 얻었고 언제 작아진 나 자신을 바라봤는지. 그런 구체적인 기록을 남겨두는 것. 그것은 단순히 기록의 문제를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방법의 문제인 것 같다. 강의실 유리창 너머로 반짝 하고 빛났던 호수 한 자락과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 혹은 위로의 목소리, 그리고 그 때 우리 사이를 흐르던 토론토의 한겨울 늦은 오후 햇살. 여기서 보내는 이 시간들도 실은, 이런 감각적 순간들로 채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순간에 깨어있고, 그것들을 기록하고, 그러면서 한 번에 한 발짝씩만 오직 지금을 살아갈 뿐인 거다.




오늘은, 아침기도와 영어작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