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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생활 칠십사일째 _ 2010년 1월 31일 일요일


오늘은, 어쩌다가, <Multicultural Canada for Haiti>라는 기부 행사에 자원 봉사 다녀왔다.

여기서 알게 된, 한국인 이민자 한 분이, 토론토에서 아이티 어린이를 돕는 행사가 있는데, 한국어 할 줄 아는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는 메일을 보냈길래, 선뜻, 한 번 해보겠다고 답장을 했던 것이 오늘 일의 시작이었다. 자원 봉사 가기 전에 사전 조사를 해봤더니, 이 행사는 토론토에 사는 다양한 인종과 언어의 사람들이 자신들 모국어로 편하게 아이티 어린이를 위해 기부할 수 있도록 토론토 방송국들과 핸드폰 회사인 벨(Bell)사, 각 국 출신의 이민자 단체 등이 함께 개최한 것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 케이블 방송으로 아이티 기부 호소 방송과 전화번호를 내보내면 각국의 언어가 가능한 자원 봉사자들이 전화를 받아 기부 절차를 안내하는 것이 이 행사의 핵심 컨셉.

아, 영어를 잘 못해도 여기서 아이티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구나, 하고 반가운 마음에 자원을 했는데, 막상 아침에 가보니, 이런 내 예상과는 달랐다. 일단 영어로 전화를 받아서 각 언어를 할 줄 아는 번호로 연결해주거나, 영어 사용이 가능한 기부자인 경우에는 영어로 기부 안내를 해줘야하고, 한국어 기부를 원하는 경우에만 한국말로 전화받으면 된단다. 네 시간동안 딱 한통화만 한국 사람이었고, 나머진 다 영어 사용자였다. Oh, my god.

버벅대는 영어로, 네 감사합니다. 아이티 어린이들을 위해 기부하시려구요? 네 감사합니다. 실례하지만 이름은요? 세금 영수증 보내드리려면 주소가 필요합니다. 네 전화번호두요. 얼마 기부하시겠어요? 비자 카드 번호는요? 카드는 본인 것인가요? 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등의 대사를 반복해서 했다. 통화를 할 수록 통화가 더 자연스러워지기는 했지만, 나는 잘 못 알아듣고 상대방은 답답해하면서 알파벳과 숫자 하나하나 불러주고 받아적는 걸 수없이 반복하기도 했다. 내 어눌한 영어 때문에 실수라도 할까봐 조마조마 하는 마음으로 일 했더니 나중에 보니 입술이 부르텄더라. 일요일 아침부터 너무 용을 썼나봐.ㅋ

일 하면서는 '영어도 못하는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니...' 하면서 마음 불편한 순간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상황이 신기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더라. 버벅대면서도 기부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 전하려고 애쓰기도 하고 때때로 농담도 하고...ㅋ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가 나이든 사람이라 돈도 없고 해서 5불 밖에는 못하는데 그래도 괜찮냐고 하던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온 가족이 얼마를 어떤 신용카드로 결제할 것인가 의논하던 이태리 아줌마까지... 모두들 따뜻한 마음으로 작은 돈이라도 보탤려고 하던 게 참 좋게 느껴졌다. 비록 전화선으로만 연결된 거지만, 사람들의 좋은 마음 같은 게 나에게도 조금 느껴졌달까. 하필이면 나처럼 버벅대는 자원봉사자에게 연결돼서 그 사람들도 참 애썼다, 싶기도 하고.ㅎㅎ

사실, 요며칠 전부터, 와 너 참 용감하다!는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서 들으면서, 와 내가 정말 용감한 걸까 하고 자아도취 좀 하다가... '용감'의 다름 이름은 '무모함'이지... 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러... 아는 사람도 하나 없이 영어도 잘 못하면서 여기까지 오다니, 나는 왜 이렇게 무모할까 라고 자책하는 중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도, 덥석, 일하겠다고 하기 전에,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는 건지 좀 자세히 물어볼 껄 하는 마음이 계속 들었다. 그런데 일 끝내고 돌아와 생각하니 그냥 무모하게 해보겠다고 해서, 이렇게 새로운 일을 재미있게 경험했구나 싶다. 이러니, 아마도 나는 다음 번에 이런 기회가 또 생겨도 이번이랑 똑같이 무모하게 그냥 한 번 해보겠다, 이럴 것 같다.


오늘은, 아침기도만.
아 맞다, 영어 듣기 말하기 공부도 네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