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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배운다는것

하기 쉬운 착각

새빨간꿈 2009. 5. 14. 21:40


내일 오후 1시에 짧은 글 하나를 발표해야하는데, 자료만 정리해놓고 아직 시작도 안하고 있다. 이번 주에 아이디어가 좀 발전하긴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아이디어들은 혼자서 그 모양을 바꾸고, 글을 쓰기 전에 예상했던 결론은 비껴나가기 마련이다. 요는, 글을 써봐야지 어느 방향으로 굴러 어디에 다다를지 알게된다는 것, 고로 글을 막상 쓰는 과정이 본격적인 작업이라는 것. 발표 전까지 16시간이 남았다. 저녁 약속에 차까지 한 잔 마시고 이 늦은 시각에 학교에 '기어올라온' 것은 이런 절박한 사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연구실에 왔더니, 같은 연구실 쓰는 한 선생님이 연구실 안에서 전화를 받고 있다. 전화기 저편의 사람은 이 선생님의 선배인 듯 한데, 이 사람이 쓰고 논문에 대해 세세히 코멘트를 하는 듯 하고, 이 사람은 그 코멘트에 대해 논평하고, 어떤 식으로 글을 고치면 좋겠느냐고 조언을 구하고 있다. 말이 좋아 연구실이지 독서실 분위기로 십여개의 책장+책상이 놓여있는 이 방에서 한 사람이 저렇게 전화 통화를 하고 있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당연히도' 방해를 받는다. 옆에서 지켜보자 하니, 이 선생님 지난 며칠간 뭔가 급한 작업을 하고 있는지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노트북 앞에 붙어있었다. 아마 나보다 더 급한 작업 중이고, 지금 마음도 절박하겠지, 싶다가도, 슬슬 열이 받는다.

나를 포함하여 공부를 업으로 삼고있는 사람들이 쉽게 빠져드는 착각 중 한가지는,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엄청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당장 학교라는 맥락만 벗어나면 내가 쓰고 있는 논문, 내가 하고 있는 연구는,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거랑 별 관계 없기 십상이다. 그리고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공부라는 건 사실 밥 짓기, 청소하기, 빨래하기 등에 비하면 생존에 있어 중요성이 떨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나는, 그리고 지금 자기 작업에 열중하여 열렬 통화 중인 저 선생님은 이 공부가 굉장히 대단한 걸로 알고 산다. 그러면서 사실 더 중요한 일들을 놓친다. 다른 사람들이 내 공부하는 일에 당연히 도움을 줘야한다고 여긴다. 다른 이들을 위해 시간 쓰는 일을 두려워하고 '내 공부 시간' 확보하느라 야박해진다.

아- 30분 넘게 이어지던 통화가 이제야 끝났다. 그러면서도 미안하다는 사과 한 마디 없다. 내 공부도 나도 내 일도 소중하고 남의 공부도 시간도 인생도 소중하다는 생각, 꼭 잊지 말아야겠다고, 이 선생님으로부터 배운다. 열받고 있지만 않고 이렇게 '배워서' 다행이다. 당신은 감사나 사과 한마디 없어도 나는 고맙습니다. 논문 열심히 쓰셔요. 나도 이제 논문 쓰기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