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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 냇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 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 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 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269, 소설의 마지막 구절)




이 대결(어머니 기숙 여사와 작가이자 인간 박완서 간의)에서 하나의 심리적 메커니즘이 만들어지는데, 바로 이것이 <나목(1970)> 이래 작가 박완서의 창작방법론이었던 것입니다. 부끄러움의 근거 묻기가 그것. 자존심의 근거 묻기가 그것. 그것은 곧 미리 핑계 만들기, 합리화하기가 그것. ... '벌레의 시간'을 증언하기, 바로 이것이 박완서 글쓰기의 기원에 해당되는 것.(292-293, 김윤식의 평론, '기억과 묘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