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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10, 토론토 일기

첫 등교

새빨간꿈 2009. 11. 25. 04:18



토론토 생활 오일째 _ 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학교에 다녀왔다. 여성교육연구센터(CWSE)의 센터장 록산나(Roxana) 교수를 만나고, 센터 조교 제이미(Jamie)로부터 사무실과 컴퓨터, 도서관 등의 사용 관련하여 안내를 받았다. 록산나 교수는 친절했고 제이미는 귀여웠으며 센터 분위기는 자유로왔다. 내 사무실과 책상, 컴퓨터가 있기는 하지만 이 센터와 관련하여 내가 의무적으로 해야할 일은 없(어보였)고, 얼마나 자주 센터에 나가 공부를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전적으로 내 자유에 맡겨져 있다. 센터 안밖에서 개최되는 다양한 행사들(세미나, 워크샵, 전시회, 영화상영회, 출판기념회 등)에 대한 참여도 자유롭게 선택하면 될 것 같다.

록산나 교수를 만나러 가기 전, 그 약속을 취소하고 싶을 정도로 긴장되고 떨렸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될까 생각해보니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영어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었다. 상대방이 나에 대해 영어도 잘 못하면서 여기까지 왜 왔냐는 생각을 할까봐 두려웠다. 그리고 영어를 잘 못하는 내가 록산나 교수의 말을 잘 못 알아들을까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잘 표현 못 할까봐 걱정되고 두려웠다. 그래서 한 시간 정도 내가 하고 싶은 말들 그리고 그와의 대화에서 나올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문장으로 적어봤다. 사전을 찾으면서 최대한 문법에 맞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골라 문장으로 다듬어보면서 록산나 교수와의 미팅을 준비했다. 
막상 그를 만났는데, 나는 준비한 문장의 10%도 써먹지 못했다. 그 이유는 록산나 교수는 주로 이야기하고 나는 주로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대화의 내용들은 내가 준비한 문장들과는 상관없이 이리 튀었다, 저리 튀었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다행히 나는 그(가 친절하게도 또박또박 천천히, 그리고 메모를 해가면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의 말을 대부분(?) 알아들었고, 잘 못알아듣는 말은 물어서 다시 들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문법적으로 틀리기는 해도 용기내어 말했다. 결국, 열심히 준비했던 문장들은 그를 만나서도 쫄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준 청심환 같은 것이었을까.

쉰 정도 되었을까, 숏컷을 한 머리카락이 온통 하얀 록산나 교수가 나를 데려간 곳은 학교 주변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는 작은 까페였다. 거기서 커피와 크로와상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 시간 남짓 나눴다. 그 까페의 잘 내린 커피 맛도 좋았고 따뜻하게 데워 먹은 크로와상도 맛있었지만, 그와 나눈 그 시간이 나는 참 좋았다. 돌아보면 별 내용도 없었는데, 여기 와서 내 앞세대의 페미니스트 교육학자를 만났다는 거 자체가 좀 좋았다. 한국 교육학 에서 보기 드문 페미니스트 연구자가 여기엔 십여명이나 있다고 하니,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꼭 다 만나고 가야겠다 싶었다. 그들과 나눌 이야기들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습, 삶 자체가 내겐 공부 거리가 아닐까.
오늘 만난 록산나 교수는 1970년에 부모님과 함께 홍콩에서 벤쿠버로 이민해온, 다문화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이다. 홍콩 출신의 중국인이면서 캐나다 이주민인 그가 교육/교육학에서의 젠더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만약 한국말로 대화했다면 넌지시 그리고 기술적으로 질문할 수 있었을텐데!) 오늘이 첫만남이고 서툰 영어로 정체성 관련하여 실례를 할까봐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살며시 다음으로 미루었다. 다만 이번 만남에서는 그의 말투, 눈빛, 그가 쓰는 단어들과 억양, 액세서리와 옷차림과 머리모양을 보고 느끼면서 (그도 나의 이런 시선을 알아챘을까...ㅋ) 내 마음대로 페미니스트 교육학자 이미지와 모델을 만들어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록산나 교수와의 미팅, 짧은 오리엔테이션 후엔 시내를 좀 걸었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바에 가서 맥주랑 햄버거, 샐러드로 저녁을 대신했다. 귀가길에는 앞으로 지낼 곳 한 군데를 구경했다. 30여평 정도의 콘도미니엄(한국으로 치면 아파트)의 안방을 렌트해주는 식인데, 방도 깔끔하고 개별 욕실과 화장실, 미니 냉장고가 있어서 꽤 독립적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학교까지의 거리(통학 시간 약 30~40분 쯤)와 부엌을 마음 껏 쓸 수 없다는 것 정도. 일단은 고민을 조금 더 해보겠다고 하고 귀가.

씻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열이 좀 난다. 요즘 토론토 날씨는 예전에 비하여 매우 따뜻한 편이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온 내게 이 곳의 찬바람은 좀 무리였던 것 같다. 일요일과 오늘 연달아 이틀간 시내를 걸어다녔던 게 열이 나는 원인이지 싶다. 게다가 무척 졸립고 피곤한 저녁. 매일 매일이 뭔가 착착 쌓이는 일 없이 몸과 마음이 피로해지는 요즘이다.




오늘은,
아침기도, 영어 문장 만들기 1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