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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생활 삼십오일째 _ 2009년 12월 23일 수요일


오늘은 여기 와서 '처음으로' 저녁 약속이 있었다.

여기 오기 전 내 머릿 속에 있었던 '이상적인 토론토 생활'은 별다른 사회적 관계들 없이,
학교와 집만 오가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삶이었다. 그런데 막상 진짜로 단순하고 반복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서울에서의 그 '관계들'이 그리워지는 거다.
처음엔 여자 친구들과 나누던 공감 백배의 수다들과 수년간 하나하나 찾아내어 즐겼던
내 입에 딱 맞고 분위기도 딱 맘에 드는 맛난 음식들과 음식점들이 그리웠는데,
(가끔 잠들기 전에 문득 생각난다, 낙성대 아이스크림 가게 아포가또와 와플!!! T.T)
시간이 지나면서는, 그저 '관계' 자체 혹은 저녁이나 술약속 그 자체가 좀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 저녁 약속은 은근 반갑고 기대가 됐다.

저녁을 함께 한 사람들은 퀘백 출신의 변호사인 백인 남자 켄(Ken)과
베트남 출신의 회사원 휘안(Hyan)이었다. 둘은 3살 반된 쌍둥이 딸을 가진 부부이고,
켄을 알게 된 건, 켄의 친한 친구가 한국에서 일을 하는데 그 직장 상사가 양의 선배여서,
토론토 오기 전 켄으로부터 메일로 몇 가지 도움을 받았던 것 때문이었다.
몇 다리 건너서 알게된 사이임에도, 어찌어찌 하다가 점심도 같이 한 번 먹었고,
오늘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부부끼리의 저녁식사까지 함께 하게 된 것이었다.

지난 번에 점심을 같이 먹을 땐, 켄의 직장 앞에서 그와 나와 양 이렇게 셋이서만 만났었다.
자신의 와이프가 베트남 사람이라고 했을 때 상상했던 것은 영어가 좀 어색한 동양 여자?
근데 오늘 만나보니 켄의 와이프 휘안은 8살 때 가족 모두가 토론토로 이민와서 이십 칠년간
영어로 생활해온, 외모만 동양인이지 거의 서양인 다운 언어 실력과 태도 등을 가진 사람이었다.
휘안의 안내로 제법 큰 태국 식당에 가서 이것 저것 많이 시켜서 배부르게 먹었다.
밥 먹으면서 영어를 듣고 말하는 게 쉽지는 않았는데, 잘 못 알아 듣는 건 그냥 패쓰 하기도 하고
내 영어가 짧으니 상대편이 먼저 상황에 맞는 표현을 해주기도 해서 그럭저럭 대화가 진행됐다.

만나고 나서 보니, 그들을 만나기 전에 베트남 여자인 휘안에 대해서 상상했던 것과 비슷하게,
캐나다인 부부에 대한 내 상상도 있었던 것 같다. 뭔가 평등하고 서로 쿨하고... 그런 것?
아마 서양인들은 아시아 사람들에 비해서 성역할 분리가 덜되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과
토론토 와서 페미니즘적인 의식이 전 사회적으로 퍼져있는 걸 보고 가진 기대가 있었던 듯.
그런데 실제로 캐나다인 부부를 만나서 이야기 나눠보니 휘안은 켄이 요리나 청소 등 집안일을
너무 안하는 게 불만이었고, 켄은 육아나 요리 같은 소위 아내의 영역은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크리스마스 날, 우루루 켄네 부모님 댁으로 몰려가는 것이나 시부모 선물 고르는 걸 지겨워하는
휘안의 모습이나... 한국의 명절과 비슷해보이기도 했다.
내 속에 또 하나의 편견이 있었구나... 싶어서 혼자 조금 겸연쩍어 졌다고 할까...

배부르게 먹고 계산은... 켄이 했다. 우리 더러는 다음에 내라며...
(그런 모습도 한국 아저씨랑 비슷하더군.ㅋ)
헤어질 때,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는 인사와 함께, 한국에서 사갔던 작은 선물을 켄에게 줬더니
무척 좋아한다. 몇 다리 건너 어찌어찌 알게 된 사이이지만,
만나서 얘기 나누고 밥도 같이 먹으니 어느새 조금 친해진 기분이다. 
그들과 친해졌다는 것은 조금 더 '알게됐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 
그리고 동시에 그들에 대한 내 편견을 조금 더 알게된 것이기도 하고.




오늘은,
아침기도, 영어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