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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10, 토론토 일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새빨간꿈 2009. 12. 27. 11:54


토론토 생활 삼십칠일째 _ 2009년 12월 25일 금요일



늦잠 자고 일어나 창밖을 보니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다.
아점을 해먹고 빨래 돌리며 인터넷 서핑 좀 하다가, 
마침 떨어진 커피 믹스도 살 겸, 바람도 쐴 겸 집 가까이 있는 한국 수퍼에 가기로 했다.
집에서 입던 옷에 세수도 않고 점퍼만 걸친 채 우두두 나갔다.
토론토의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설이나 추석 명절 같다더니
정말로 거리엔 사람도 없고 상점도 문을 다 닫고 바람만 쌩쌩 분다.

집에서 오분 떨어진 한국 수퍼는 좀 작아서 그런지 가격이 비싼 편이라
한 번 휙 둘러보고 조금 더 떨어진(지하철로 반 정거장?) 큰 수퍼에 가봤다.
세일 가격에 커피 믹스를 사고, 온 김에 간장과 마늘 다진 것, 쌀도 10 파운드쯤 샀다.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람은 불고 짐은 무겁고 둘이서 낑낑 대면서 겨우 걸어왔다.
그런데도 작은 방에다 두 달치는 족히 될만한 쌀을 부려놓고 간장과 마늘을 보면서
조금 흐뭇해진다. 2월까진 저 쌀로 밥 해먹을 수 있겠다, 이제 생선 사다가 조림도 해먹고,
콩나물 볶음도 해먹어야지... 하고 생각만 해도 부자가 된 것 같은 마음이다.

그저껜가는 방이 추워서 창문 두 개에다가 바람막이용 비닐을 붙였다.
창틀 네 면에다가 양면 테잎을 붙이고 얇은 비닐막을 그 양면 테잎에다 붙여두는 것.
길이를 재고 비닐이 울거나 구겨지지 않게 잘 붙이는 일이 둘이 붙어서 해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서울에서 살 땐 이런 일 해보지 않아서 둘다 손이 서툴고 꼼꼼치 못했다.
방값 싼 것에 정신 팔려 추운 방인지 따져보지도 않고 들어왔나 싶어 일하면서 짜증도 났다.
그런데 둘이 손 맞춰 일을 하다보니 조금씩 재미가 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젊은 시절의 엄마 아버지 생각이 났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살았던 집은 외풍이 심한 작은 한옥이었는데,
가을이 되면 엄마랑 아버지가 창마다 문풍지 바르고 바람 막을 비닐을 대곤 했었다.
두 분이 가위 이리 가져와봐, 여기 이렇게 잡아봐바... 하면서 추운 집을 될 수 있으면
따뜻하게 만들어보려고 낑낑 거리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나는 임시로 사는 방이 추워 바람막이 대면서도 이렇게 짜증나고 불평하는 마음이 생겼는데,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 데리고 사는 집이 추웠으니 그 형편이 얼마나 서글펐을까.
가난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던 그 시절에, 기한이나 희망없는 그 추위가 얼마나 혹독했을까.

나의 엄마 아버지 말고도 내 부모 세대의 사람들은 모두들 그런 가난과 추위를 이기며
살아왔겠지. 또 그 전 세대에는 가난과 추위와 전쟁을 겪었을 거고, 그 전엔, 또 그 전엔...
그리고 지금도, 2009년 겨울 서울에도, 기약없는 가난과 추위를 겪고있을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깐, 이 멀고 추운 나라에 와서, 이렇게 사서 하는 고생이 고맙다.
난방 잘되는 아파트에서만 살아봤다면 이런 생각들을 떠올리기 힘들었을 것 같아서.
돈 아껴가며 쌀과 부식 거리를 사고, 추위를 막으려고 바람막이를 하면서,
이제 겨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조금 알게 된 것 같아서.



오늘도, 아침기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