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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생활 사십삼일째 _ 2009년 12월 31일


아침 열시쯤 늦잠 자고 일어나는데, 벌써 이천십년으로 넘어간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이천구년의 마지막날, 새해가 시작되는 데에도 이렇게 시차가 있구나, 하고 시작한다.
늦은 아침을 해먹고, '도서관 노는 날이 곧 나의 휴일이다' 하고 생각한 데로,
느즈막히 그리고 느리게 낮 시간을 보냈다.
천천히 오래오래 샤워도 하고 미뤄뒀던 빨래도 하고 어제까지 구름끼어있던 기분도 씻어내고.

늦은 오후엔 옷 챙겨입고 사촌 동생과의 저녁 약속 때문에 다운타운으로 나갔다.
토론토엔 온갖 나라의 음식들이 다 있는데, 그 중 흔한 게 타이 음식이다.
그 흔하디 흔한 타이 음식점 가서, 와인도 한잔씩 하며, 제법 사치스러운 저녁 식사를 했다.
자리를 옮겨 차도 한잔씩 하고 동생집 잠깐 들르니 9시가 넘었다.



오늘 자정엔 토론토 시청 앞 광장에서 콘서트도 하고 카운트 다운도 같이 한다길래,
어떤가 구경가자 마음 먹고, 그 시간 될 때까지 영화 한편 보러 던다스 역(Dundas Station) 근처
AMC 극장에 갔다. 서울의 멀티플랙스 극장들과 거의 비슷한데, 재밌게도 지정 좌석이 없었다.
시간 맞춰 선택한 영화는 <An Education>(2009). 196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환데,
영국식 영어 정말 안들리더라. 어느 정도였나 하면, 인물 간의 갈등이 폭발되고 해결되는
대부분의 장면들을 표정과 분위기로 이해했다.
그러니 같이 극장에 있었던 중년의 아줌마들이 왜 그렇게 껄껄 웃는지,
잘 이해가 안되더군.
선댄스 영화제에서 스포트 라이트 받았다는데, 뭐가 재밌는지...
영어가 안들려서 그런지.... 허허.....



영화 보고서 한 정거장쯤 걸어 시청에 가니, 어느새 여기저기서 모인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이민자의 도시 답게 정말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 틈새를 부비대며 카운트 다운 전광판이 보이는
곳까지 이동하니 이천구년이 딱 오분 남았다. 술에 취한 젊은 애들은 뭐가 좋은지 떠들고 흔들고,
가족 대동해서 나온 사람들은 손 놓칠까 서로 불러재끼고, 연인들은 끌어안고 쪽쪽 대고....
암튼 그 틈바구니 속에서 이천십년을 맞았다. 생각해보면 별로 감동적일 게 없는데, 왠지 흥분흥분.
카운트 다운이 끝나자 폭죽이 터지고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고... 나는 잠시,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들과 가족들의 안녕을 기도했다. 그리고 지금 이대로 참 좋다, 하고 생각했다.

귀가길,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공짜로 운행한다는 지하철엔 사람이 제법 많다.
젊은애들은 집에 가는 길에도 떠들고 흔들고, 연인들도 계속 끌어안고 쪽쪽... 그리고 나는 졸리고
피곤했다. 몇 사람들은 카메라 속 카운트 다운 장면들을 보는 듯, 흐뭇하게 미소짓는다.

이렇게 다시 새해를 맞는구나.
살아있어서 맞이하는 이 시간, 이 순간의 흐름들이 그저 담담하게 기쁘다.


오늘도,
아침기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