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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뉴[반짝]

모의(謀議)에 대한 욕망

새빨간꿈 2010. 1. 5. 05:00



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모의(謀議)의 뜻이 이렇다.

첫째, 어떤 일을 꾀하고 의논함.
둘째,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범죄를 계획하고 그 실행 방법을 의논함. 또는 그런 일.

모의, 라는 걸 해본 지 너무 오래됐다는 생각을 하던 끝에, 이렇게, 사전을 찾아 말의 뜻을 살펴본다.

운동을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내가 참 재미나다고 느끼던 순간은 몇 사람이 모여서 뭔가를 모의할 때였던 것 같다. 내가 먼저 의견을 내고 사람들을 모을 때도 있었고, 다른 사람의 제안에 참여했던 적도 있었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이디어만 가지고 모여서, 머리 맞대고 그걸 발전시키고 눈덩이처럼 굴려 물질적인 조건들을 마련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쪼개고 배치해서, 디-데이에 짠, 하고 성과를 내는 과정. 그 과정에 매료돼서 힘든 줄도 모르고 (ㅇㅊ의 표현대로 에너지도 없는데 늘 무리하며) 여러 번 모의하고 일하고 모의하고 일하고를 반복해왔던 것 같다. 사실, 세상을 바꾸는 큰 움직임도 고스톱 멤버 정도가 모여서 뭔가 모의를 시작했을 때 싹텄던 것들이 아닐까.

스물 아홉에서 서른살로 넘어가던 때엔 동갑내기 여자친구들이랑 작당 모의해서 '서른 파티'라는 이색적인 송년회를 열기도 했고, 성폭력 사건 이후의 후유증에 막 시달리던 때엔 여자 선후배들이 모여 '아카데믹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경험을 나누기도 했다. 학부 땐 ㅇㅊ랑 둘이서 과방을 장악하고서, 옷장 안 헌옷들을 팔아치워 구속 학우를 돕는, 뭔가 뜻있는 벼룩시장을 하기도 했었지. 'ㅇㅅㅎㅂㅇㄷ' 일할 땐, 거의 매일이 뭔가 새로운 일, 세상을 놀라게 할만한 일(!)을 모의하느라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갔었고...

전업 학생이 되어 공부하면서, 내 삶이 건조하다고 느낀 것은, 뭔가 이런 모의가 없어서였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관심사가 다른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책과 노트북만 들여다보는 연구실, 다른 사람의 글이나 아이디어에 대해 토론하는 문화가 점차 사라지는, 오직 '실적'과 '영어'가 제일 관심사가 되어가고 있는 대학원 사회... 그 속에서 답답하고 지루한 일상을 견디게 했던 건, 페미니스트 친구들과의 세미나와 스터디, 그리고 나 혼자 모의해서 학생들과 함께 운영해갔던 수업 정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가끔은, '혼자 꾸는 꿈은 꿈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입니다'와 같은 유명한 문장이 내 일상을 가슴뛰는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것 같아서 절망스러워하고 조바심 났던 것 같다.

요즘은, 그 절망감과 조바심이 조금씩 지나가고, 모의에 대한 욕망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걸 느낀다. 남들이 모의했던 결과를 보는 것, 거기서 팁을 배우고 영감을 얻는 것이 재미있다. 희망제작소 같은 씽크탱크를 엿보는 게 흥미롭다. 토론토 대학 근처의 페미니즘 전문 서점(Toronto Women's Booksrore, http://www.womensbookstore.com/)도 관심을 끈다. 그리고 최근에 내 눈을 확 잡아 끈 건 카우치 써핑(couchserfing, www.couchsurfing.com)과 일상예술창작센터(http://www.freemarket.or.kr/v3/)이다.

카우치 써핑은 내 집에 다른 나라에서 온 여행자를 무료로 재워주는 사람들의 네트워킹이다. 사이트에 가입하고 정보를 남겨두면 세계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 검색하고 연락해서 숙박이 가능하게 되는 시스템. 안전의 문제를 포함, 서로를 신뢰해야지만 가능하고, 내가 외국의 어느 집에서 진 빚은 내 나라에 온 다른 이에게 갚는 pay forward 형식의 교환이라는 점에서, 무지무지 반자본주의적이다.
일상예술창작센터는 홍대 앞 프리마켓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예술을 사람들의 일상과 연결시키려는 시도이다. 이 센터는 고급 예술이라는 제도권 밖에 있는 아웃사이더 예술가들의 길드이기도 하고, 생활창작공간 '새끼'와 같은 교육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나처럼, 직업적인 예술가는 아니지만 뭔가 손으로 예쁘게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겐 문턱 낮은 디자인 교육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는 일상과 예술을 잇는다는 점에서 대안적인 예술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답답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나에게도, 아직은 완전 생짜 아이디어들이긴 하지만 해보면 좋겠다 싶은 일들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 자꾸 떠오른다. 오늘 아침에 문득 들었던 생각은, 일년에 한 번 정도, 내 여자 친구들끼리 모여서 벼룩시장 같은 걸 해보면 어떨까 싶다. 이제 더이상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그러나 버리기는 아까운 옷, 악세서리, 신발 등등을 교환하고 팔고, 그렇게 해서 남은 돈으로는 좋은 일도 하고, 그 김에 모여서 작은 송년회나 신년회도 겸하면 좋을 것 같다. 공부하는 친구들끼리는 책이나 문헌들 싸들고 와서 팔고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고.ㅎ

논문 인터뷰 때문에 만났던 ㅎ선생님의 일생은 늘 뭔가 모의하고 작당하는 과정이었다. 선생님은 평생 비정규직과 전업주부와 발런티어를 오갔던 분이지만, 그 분의 아이디어만 모아도 책 한 권은 나옴직한, 남자로 태어났다면 박원순씨 정도는 됐을 정도의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아마 그 분의 삶에서 그 많은 모의의 순간들은 삶의 에너지를 분출하고 또 모으는 소중한 순간들이었을 것 같다. 내 속에 꿈틀대는 이 모의의 욕망들을 분출시키고, 내 주변의 여자들도 모의하고 작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혼자 꾸었던 꿈을 모여서 논의하고 발전시켜 현실화시키면서, 그 새빨간 꿈들이 그저 흘러가는 생각들이나 우울증 일으키는 망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