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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생활 사십팔일째 _ 2010년 1월 5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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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하교길 지하철이 붐볐다. 아마 사고가 난 듯, 운행 시각이 불규칙했나 보다. 사람들로 꽉찬 지하철 안은 마치 서울 같다. 간만에 사람들에 치이는 느낌, 오랫만이라도 좋지 않다. 그렇게 사람많은 지하철 한 좌석 앞에 까맣고 곱슬곱슬한 털을 가진 긴 다리의 개 한 마리가 있었다. 앉아있는 주인 다리 옆에 얌전히 딱 붙어앉아 있는 모양이 일찍 철든 맏이 같다. 그러고 보니 개의 주인은 인도 여자인 것 같은데, 맹인이었다. 듬직해 보이던 그 개는 맹인 안내견이었던 것이다.
마침 나와 같은 역에서 내리길래, 개와 개주인을 살살 뒤따랐다.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를 보고 개가 올라가려고 하자 퇴근길인 것 같은 한 젊은 남자가 그쪽으로 가면 안된다고 계단 위까지 개와 개주인을 안내했다. 지하철 계단 위로 올라와서 횡단보도 앞에서는 신호등 바뀌는 타이밍을 양이 알려주었다. 맹인 안내견을 데리고 다니는 그 여자는 지하철을 타고 내려서 횡단보도를 건너기까지 자신의 개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의 친절과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그런 도움들이 없이는 이 도시에서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삶은 의존적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늘 본 그녀의 길은 의존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독립적인 삶이라는 것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남들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고, 나또한 남들을 기꺼이 도와주며 사는 삶일 것이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부처님의 연기법도 이런 삶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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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피곤해서, 얼른 일기 쓰고 자려는데, 우연히 이 칼럼을 읽게 됐다.


가슴에 얼음이 녹으면 눈물이 된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은국의 엄마입니다. 선생님이 은국이의 편지에 답하는 글을 써 주셔서 너무도 고맙습니다. ‘한국은 요즘 갑자기 추워졌다고 한다. 감옥에서 얼마나 추울까. 나는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 마음이 그렇기에, 그 따스한 말씀에 울컥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선생님의 글은 저와 은국, 수많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여리고 가녀린’ 그 아이들이 한 줌의 햇살이 있는 담에 기대어 선 것 같은 안도감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기억하지 못하고 잊혀진 존재 같다’는 말을 했던 그에게 선생님의 글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될지 아실 것입니다.

저는 어미로서 단지, 그 아이가 행복하기만을 바랐습니다. ‘이념이 뭔데? 신념이 밥 먹여주냐?’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라크에 인간 방패로 다녀오고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다녀와서 그들의 참상을 말할 때조차 “그래,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정도였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기는커녕, 외면하고 안 보려 했습니다. 지켜볼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슬픔과 고통이 내 것이 될까 봐 두려워 피하기만 했습니다.

서준식 선생님의 옥중 서한을 읽고 ‘참으로 아름다운 분이다’ 하는 생각만 했지, ‘내 아들이 그런다면?’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옷을 입을까? 무엇을 맛있게 먹나? 어디에 가면 어떤 물건이 싸고 좋은가?’ 하는 그저 생물적인 인간으로서 살던 저에게 은국이는 낯섦, 그 자체였습니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네가 해라

저를 자책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바르게 살지 못해서 그런가 하고. 저는 지금도 두렵습니다. 감옥에 있는 은국이가 느낄 추위와 소외감과 이질감이 무섭고 밖에서 따스하게 먹고 자면서 태연히 살아가는 저도 무섭습니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10분을 바라보며 “잘 있니?” “잘 있어요” 형식적으로 말하며 웃고 돌아서는 이 현실도 무섭습니다.

때로는 혼자 웁니다. 편지를 쓰다가도 울고, 편지를 받고도 훌쩍거립니다. ‘가슴에 얼음이 녹으면 눈물이 된다’고 누가 말하더군요. 이제 제 심장의 얼음이 녹나 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 네가 해라.” ‘옳은 일은 옳은 일이다’ 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제 자식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런 은국이에게 ‘그렇다’라고 말씀해 주셔서 다시 감사드립니다. ‘내가 이런 기분에 젖도록 해 준 그에게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보낸다. 그런 사람이 우리가 인간에서 비인간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경고해 주는 귀한 존재다’ 그 말을 늘 잊지 않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수감중인 은국이 엄마 윤혜숙 드림

- [한겨레/독자칼럼: ‘감옥에서 얼마나 추울까’ 따스한 그 말씀에 울컥 / 윤혜숙(2009. 12. 24.)

은국이를 처음 알게된 건, 그가 이라크 전쟁 인간 방패로 갔을 때였다. 그 때만 해도 어렸던 그가 나중에 평화운동을 하고 팔레스타인에 다녀왔다는 얘기, 양심적 병역거부를 했다는 얘기는 소문으로만 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 얘기들을 무감각하게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겨울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감옥에 있는 그의 사연을 그의 어머니의 글로 읽으니 마음이 아프다. '따스하게 먹고 자면서 태연히 살아가는' 자신이 무섭다는 윤혜숙 씨의 말처럼, 이 겨울, 내가 겪는 추위만 안중에 있었던 내 삶이 조금 무서워졌다.


오늘도,
아침기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