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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10, 토론토 일기

제이미

새빨간꿈 2010. 1. 12. 12:06


토론토 생활 오십사일째 _ 2010년 1월 11일 월요일


CWSE에 나가서 공부한지 어언 사십일이 넘었는데, 나는 거기 가면 묵언 수행하는 스님처럼 거의 말을 안한다.ㅋ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의 센터 일정을 보면, 정오 즈음에 코디네이터 제이미가 와서 문을 열고,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조교인 세라, 스테파넬, 애슐리, 렌 등의 학생들이 정해진 요일의 오후 한시쯤 온다. 그리고 오후 네다섯시가 되면 각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오후 즈음에 간간히 센터장 록산나 교수가 들러서 제이미와 회의를 하기도 하고, 행사 관련 연구자들이나 예술가들, 센터의 원로 등이 들러서 수다를 떨다 가기도 한다.

나는 센터장, 센터 코디네이터, 센터 관련 페미니스트들, 센터의 조교들이 왔다 갔다 일을 하고 만나고 회의를 하는 와중에, 오전 11시에서 12시 사이에 등교해서 오후 6시쯤 하교한다. 그들이 진행하는 여러가지 프로젝트와 행사 등과는 무관하게, 나는 내 논문도 쓰고 수업 준비도 하고 그런다. 지난 연말에 포트락 파티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다들 바쁜지 함께 점심을 먹는다거나 차를 마신다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센터장과 코디네이터가 바뀐지 얼마 안되었기도 하고, 문화 자체가 그냥 자기 할 일 하고 각자 간섭 안하는... 그런 분위기인 것 같다.

처음엔 센터 가서 아무 말 않고, 그들이 진행하는 일과 별개로 내 공부만 한다는 게 좀 불편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는 점점 익숙해져 갔다. 그렇게 시간 보내는 것이 애초에 내가 계획한 비지팅 스칼라로서의 일정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데 그렇게 익숙해져 가는 것과는 별개로... OISE 페미니스트 교육학의 중심인 이 센터에 친구 한 사람 없다는 것이 아쉽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난 연말에 센터 코디네이터 제이미와 점심 약속을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오늘에서야 이행했다.ㅎ

사실 제이미는 나에게 좀 무뚝뚝해 보였다. 자기 할 말만 딱 하고 쓸데없는 농담도 않고 만나도 데면데면 하고. 그런데 오늘 점심 먹으면서 보니깐 참 착하고 예쁜 사람이더군. 나는 영어가 잘 안되고 제이미는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는 탓에 대화는 중간 중간에 딱 딱 끊기곤 했지만, 서로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하고,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면서, 장점도 보이고 매력도 보이고 또 그의 입장이 이해되기도 하고... 그렇게 되더라. 둘 다 OISE의 페미니스트 할머니 교수, 아줌마 교수들이 너무 인상적이라며 좋아하고, 토론토 여자들 패션에 대해서도 의견 공유하고, 앞으로의 삶이나 꿈에 대해서도 생각들을 나눴다. 돌이켜보니, 참 간만에 '새' 친구를 사귀는 시간이라, 어색하기도 했지만 신선하기도 했고, 제이미 표현대로 무지 '러블리한' 점심 식사 시간이었다.

서울에선 늘 익숙한 공간에, 늘 익숙한 사람들과 만나고 놀면서, 누군가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서 선뜻 손을 내밀거나 새로운 집단에 불쑥 찾아가 거기 섞이는 것을 한참동안 안해본 것 같다. 여기 오기 전에 청년 정토회(club.cyworld.com/youngjt) 사람들과 친해질 때도, 몇 번이나 어색하고 불편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걸 정토회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내가 나이 들면서, 혹은 익숙한 것에 편해지면서, 새 만남에 낯설어했던 것 같다. CWSE에서도, 누가 나한테 먼저 말 걸기 전에는 입 딱 다물고 앉아있기만 했으니, 제이미나 조교 학생들이 보기에, 나는 동양에서 온 무뚝뚝한 아줌마였을 듯.ㅋ 조금 다가가서 몇 마디만 나눠도 이렇게 기쁜 '사교의 순간'들이 열린다는 걸, 너무 어릴 적 경험들이라 까먹고 살았던 것 같애.

제이미랑 점심 잘 먹고 기분 좋게 오후 시작했는데도, 오늘은 아티클 리딩이 잘 안되더라. 센터에 사람들이 좀 많이 들락거리기도 했고,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피곤한 탓도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일찍 자고, 조금 더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을 좀 더 정착시켜봐야지. 오늘 공부는 오늘로 털어버리고, 내일은 또 새 시간에 새 공부를.


오늘은 아침기도와 영어 작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