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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가 있다, 공부가 드럽게 안될 때. 단 십분 동안의 집중도 안될 때.
그럴 때, 인터넷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가방 싸서 휙 도서관을 나가버리기도 하고,
극장에 가 앉아있거나 오래된 공원에 가거나 친구를 불러내기도 했던 것 같다.
일찍 귀가해 티비 앞에 붙어있기도 하고 낮술을 마시러 학교 앞 술집에 가기도 하고.

최근의 깨달음으로는, 이런 경우에도, 스스로 정한 시간만큼은 앉아있는 게 낫더라.
단 십분 어치의 성과밖에는 못 얻어도, 그냥 하기로 한 만큼은 앉아있기.
그러다보면 들썩이던 엉덩이도 숨이 죽어 잠잠해지고, 절대 안될 것 같은 집중도 조금씩 된다.
무엇보다 몸이, 가만히 앉아서 읽고 쓰고 생각하는 리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물리적으로나마, 나를 여기 책상 앞에 가만히 둔다, 요즘은, 공부가 안되는 날에도.

그런데, 공부가 드럽게 안될 때 생기는 더 큰 문제는, 이런 물리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그건, 내가 왜 이 공부를 하고 있나,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드는 순간, 내 속에서 일어난다.

나는 왜 이렇게 잘 나고 부유한 여자들, 많지 않은 혜택을 받은 여자들, 가난이나 차별이라는 게 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받아 적고 파고들고 있는 것일까.
그 여자들의 삶이 나에게 비춰주는 건 뭐고 내 앞에서 감춰버리는 건 뭘까.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 공부를 하면서 먹고 살려고 하는 나에게 그 여자들은 과연 뭘까.
뭐 이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다 보면, 책상 앞에 앉아있기는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읽고 있던 논문과 인터뷰 내용과 영어 문장들과 자질구레하게 발견한 사실들로부터
백만광년 밖으로 막 나가버린다. 그리고 나가버린 그 마음이 다시 돌아오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곤 한다.

오늘, 나, 또, 그 질문의 덫에 빠져서... 이미 안드로메다... 그보다 더 먼... 우주... 어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