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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10, 토론토 일기

'왕피곤'

새빨간꿈 2010. 2. 12. 13:18

토론토 생활 팔십사일째 _ 2010년 2월 10일 수요일

대학 후배 중에 별명이 왕피곤,이라는 친구가 있다. 토론토 오기 한달 전쯤이었나, 자전거를 타고 학교 후문 근처를 지나가다가 왕피곤,을 우연히 마주쳤다. 학교 졸업하고 몇년만이었을까. 연락도 만남도 없이 지내다가 우연히 마주친 거라 나는 좀 서먹했는데, 그는 예의 그 큰 목소리로 "누나-" 하고 외친다. 타고 가던 자전거를 세우고 몇 마디 나누는데, 왕피곤의 표정엔 '반가움'만 가득 하다. 너 뭐하고 지내냐, 하니 뭐 그냥 아직 단체 활동 하고 있죠, 라고 대답하는데, 조금 민망한 표정인 것 같다. 나도 포함되었던, 대학 시절 학생운동 했던 사람 중에 왕피곤처럼 아직도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기도 벅차다. 그런데, 그는 조금 민망하고 부끄러워하는구나, 라고 그 짧은 순간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 한 번 보자, 하고 마음에도 없는 약속을 하고 헤어지는데, 돌아서는 순간, 그가 나를 반가워해줘서, "누나-"라고 큰 소리로 불러줘서 고마웠다.

왕피곤,이라는 별명을 누가 지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그가 왕피곤,인 이유는 말이 많고 또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었다. 술자리에서건 과방에서건 집회에 나가서건 그는 언제나 상대방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표정으로 뭔가 말하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가 꽤 커서, 그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들어주기에는 모두들 좀 피곤해 했었다. 그의 '말공격'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그 별명 한 번 잘 지었다,라고들 했다. 학교 졸업하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나는 그 별명 '왕피곤'이 재미있고 웃겼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컸던 건 귀가 잘 안들려서란다. 자기 귀에 잘 안들리니 자연히 목소리는 커지는 거였겠지. 그 '사연'을 듣고서, 나는 잠시 멍했다. 그리고나서 그 별명 '왕피곤'은 나에게 재밌지만은 않은, 뭔가 복잡한 의미를 가진 단어가 되었다.

이상하게, 너무너무 피곤한 날엔 그 친구가 생각난다. 아 피곤해, 아 맞다, 왕피곤이 그 친구 별명이었지, 아 근데 걔는 귀가 잘 안들려서 목소리가 컸던 거지... 이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내가 대학 2학년이었고, 그 친구가 신입생이었던 시절, 단둘이 그 친구네 집 앞까지 갔던 새벽이 생각난다. 우린 둘다 술에 취했고, 왕피곤은 나보다 조금 더 취했던 거 같다. 난 선배랍시고 술에 취한 후배를 집까지 데려다줘야 한다는 사명으로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그의 집까지 걸어서(아마 택시비가 없었던 것 같은데..ㅋ) 같이 갔다. 취중의 새벽 귀가길, 왕피곤은 술에 취해 더 커진 목소리로 자신의 가족사를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했다. 내용은 거의 기억이 안나지만, 꽤 슬펐다. 나는 진심으로 그의 슬픔을 동감했고, 그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격려했다. 그리고 그 후론 그의 말을 진심으로 열심히 들어준 기억이 없는 것 같다.

오늘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피로감이 갑자기 몰려온다. 잠시 쉬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이 완전 피곤한 이 순간, 왕피곤이 생각난다. 그는 여전히 그 큰 목소리로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지내고 있을까. 왜 그렇게 큰 목소리로 주저리주저리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는지, 돌아가면 한 번 물어볼까. 아니, 그냥 맛나는 안주에 술이나 한 잔 사줘도 좋겠다, 싶다. 그러고 나면 아무리 피곤해도 그의 별명, 왕피곤,을 떠올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라고 믿고 싶다).


오늘은, 아침기도와 요가(50분).
+ 영어 문장 5개 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