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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10, 토론토 일기

외모의 게임.

새빨간꿈 2010. 2. 22. 06:56


토론토 생활 구십시일째 _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OISE에 와서 알게된 한국인 대학원생이 자기 친구 Christine을 소개하겠다고 메일로 얘기한 적이 있다.
Christine도 OISE 대학원생이고, 여성주의와 성인교육 관련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다는 거다.
아, 같은 페미니스트 교육연구자를 만나는구나, 싶어서 좋다고 대답하고 나서, 정작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아- 하고 나 자신에게 놀랐다. 'Christine'이라는 이름, '여성주의', '대학원생'과 같은 말들의 조합으로
내가 떠올렸던 그녀의 이미지는, 백인-젊은-이쁜-비혼녀,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니 Christine은 백인이었지만 젊지 않았고 이쁘기보단 자애로운 분위기의 여자였다.
여자=젊은 여자, 외국인=백인 이라는 등식이 나에게 있었던 거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힌트 준 적 없었는데.
게다가 분명 이쁠 거라고 생각했던 건 또 뭔가. 백인 여자는 동양인보다 이쁘다, 하는 명제도 내게 있었던가.

몬트리올에 갔을 때, 케빈의 친구인 Brigid을 처음 만날 때도 비슷하게 충격적이었다, 물론 나 자신에게.
어느 지하철역에서 케빈과 양, 그리고 내가 Brigid을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금 늦는 거다.
이제나 저제나 그녀를 기다리며, 이번엔 내가 케빈에게 먼저 물었다.
Brigid은 white야? 그랬더니, 응, 한다.
그러고 잠시 후 케빈이 왔다, 해서 돌아보니 그녀는 무척 살이 찐 여자였다. 이번에도, 아- 하고 놀랐다.
이번엔, 내 안에 있었던, 백인 여자=날씬한 여자, 아니 여자=날씬한 사람, 이라는 등식을 발견한 거다.
그래서 그날 밤 내내 Brigid에게 미안했고, 나 자신에게 부끄러웠다.

오늘 본, 당근의 만화 <살(http://ildaro.com/sub_read.html?uid=5162&section=sc42&section2)>은
자꾸만 Brigid을, 아니 그녀를 보고 잠깐 놀랐던 나를 생각나게 한다.
가부장적인 사회의 '외모의 게임'은 무조건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다.
거기엔 날씬함, 젊음, 하얀피부, 오똑한 코, 큰 눈, 작은 얼굴, 작은 윤곽... 등이 그 반대항보다
더 우월하다는 절대절명의 룰이 작동한다.
이 룰 안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 있는 여자는 길게 보면 없다.
모두들 나이들고 살이 찌고 눈은 점점 작아지고 피부에는 크고 작은 점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동양인 여자인 나는 백인들과 함께 있는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외모를 가졌다.
어떻게 해도 작은 얼굴에 블론드 헤어, 아무렇게나 머리를 묶어도 이쁜 두상과
아무렇게나 입어도 간지나는 긴 다리를 가질 수 없다.
그런데도 그 게임의 전제들을 고스란히 내 안에 두고, 나와 다른 여자들을 그 잣대로 본다(judge).
그래서 스스로 위축되고, 다른 여자들도 위축시키고 있다.
그러니, 이 게임의 판을 뒤집어버리는 연습을 자꾸 해야할 것 같다.



오늘은, 아침기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