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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생활 백일째 _ 2010년 2월 26일 금요일

눈이 많이 내린다. 서울은 벌써 봄이 온 것 같다,고들 하던데, 여긴 아직도 겨울, 이라고 창밖에 펑펑 내리시는 눈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로 여기 온지 백일. 감개무량, 이랄까. 암튼 마냥 즐겁고 재미있지만은 않았던 시간들. 그래서 나는 여기 와서 한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 늘 조금씩 걷고 뛰고, 때로 주저앉기도 했지만, 또 일어나 어딘가 '가고 있는'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 경험하는 '지금-여기'에서의 온갖 생각들과 느낌들, 감정들이 결국은, 내가 오랫동안 머물렀고 존재했던 '거기'에서의 나를 돌이켜보고 설명하는 것으로 귀결되더라는 것. 여기서 뭔가 기쁘거나 괴롭거나 슬프거나 화가 날 때, 그런 감정들이 불러일으키는 것들은 결국, 서울에서, 나 어떻게 살았지. 어떻게 공부했지. 언제 행복했지. 언제 지독하게 우울했고 언제 가장 힘들었지. 하는 질문들과 연결되어 버리곤 하더라.

내 노트에, 한 장씩 굴러다니는 종이들에 쓴 메모들.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던 불안
: 서구에선 지금도 뭔가 이루어지고 있을텐데, 나만 서구의 흐름에 뒤쳐지는 것 아닐까
; 주류의 흐름에 나만 뒤쳐져서 재미없게 살게 되는 건 아닐까."

"그 때 우리의 경험도, 여기 이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다시 읽은 것처럼,
다시 읽을 수 있을까."

여기 와서야 서울에서, 그 답답한 캠퍼스 안에서, 무엇에 답답해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어떻게 살고싶었는지를, 그리고 어떤 함정에 빠져서 어떤 것들을 반복하고 있었는지를 조각 그림 맞춰가듯이 알아내고 있다. 물론, 그 알아냄의 순간들도 모두 현재에 비춰 보이는 것들이고, 그러나 그게 바로 기억이고 의미이고 삶이니깐.

오늘은, 여기 와서 생활한지 백일을 꽉 채운 날이기도 하지만, 빼먹지 않고 아침기도를 한 지 백일 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하루 백팔배씩 백일을 했으니 이제 만배를 좀 넘겨 채운 셈이네. 백일기념,으로 오늘 아침엔 오백배 했다. 좀 길게 절을 하다보면 평소에는 떠오르지 않던 생각이나 감정이 무의식에서 잠깐씩 의식으로 올라오곤 하는데, 오늘 아침엔, 별 생각이 떠오르지 않더라. 그런데 잠깐, 이런 생각이: 어떤 세팅 속에 있는 나를 특정한 의미로 읽어내는 건 결국 내가 '하는 것'이로구나. 다른 여자들의 삶을 보다 급진적으로, 보다 혁명적으로 읽어내려고 하는 내 꿈에, 나 자신의 삶과 일상도 포함시켜볼 것.

몬트리올의 어느 까페에서 쓴 메모처럼, "좋은 추억들과 그걸 기억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지구 어느 점 위에 내가 있으며, 그 점을 통해 세상에 연결돼 있는 내가 좋다."



오늘은, 아침기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