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그물에걸리지않는/황홀한일상

일기.

새빨간꿈 2008. 10. 8. 22:19


어릴 때, 동생이랑 싸웠거나, 엄마한테 혼나거나, 괜히 외롭고, 또 슬플 때, 나는 종종 일기를 썼다.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실컷 쓰고 나면, 그러면서, 좀 울고 나면, 마음이 왠지 가벼워져서, 그리고 우느라 힘을 다써서, 일기장을 어딘가 치워놓고, 한잠, 푹 자곤 했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세상은 말끔해지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웃었다.

몇 달동안 술을 한방울도 안마셨다. 전혀 마시고 싶은 생각도 안들던 그 몇달. 그런데 이틀째 밤엔, 누구와 같이 있던 자리였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맥주 한 잔을 받아마셨다. 안마시기가 힘들더라. 그날밤 소주도 한잔 마셨다. 그리고 대구에 있던 그 며칠 동안의 밤엔 매일 맥주 다섯잔 정도를 마시고 잤다. 잠이 안오는데 혼자 말똥거리며 또 눕게 될까봐 겁이 나서. 그래도 술기운이 가시면, 새벽엔 어김없이 깼다. 서울에 돌아오니 밤마다 술 생각이 난다. 알코올에 뇌를 조금 적셔주면 이 말똥말똥한 괴로움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그러나 정작 며칠간 마신 술의 총량은 그저께 카프리 한 병이 다다. 술도 마음껏 못마시겠다.

일기를 쓰고, 울고, 술을 마시고, 한잠 자고 나면, 다시 말끔해지곤 하던 세상이, 좀처럼 개운해지지 않는다. 일기장을 덮고 나도, 술에서 깨어나도, 그냥 그대로인 부재. 마음을 둘 곳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