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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생활 백이십칠일째 _ 2010년 3월 25일 목요일


1.
사전을 찾아보니 시야의 한자가 이렇다: 視野
이렇게 멋진지 몰랐다. '볼 수 있는 들(의 범위)'라는 뜻인가.
아마 이 말이 동물들의 시각 범위를 뜻하는 데서 나온 거라 그런 것 같다.

2.
박사과정 이학기 때였나, 페미니스트 입장론(standpoint theory) 수업을 들었을 때,
나를 가장 매료시킨 문장은 이거였다: "억압받는 자들의 입장이 가장 혁명적이다."
멋진 이 문장이 좋아서 기말 페이퍼 쓸 때도 여러 번 반복해서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 억압받는 위치, 주변에 있는 이들의 입장이 가장 급진적인 것인지,
그걸 잘 정리하지 못했다, 아니 절실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3.
북미의 큰 대학에서 영어로 이루어지는 수업을 백인들과 함께 듣고
여러 인종과 국적이 섞여있지만 서유럽과 북미의 백인 문화가 중심을 이룬 도시에서 생활하면서
현재의 이 지구 질서에서 내가 절대로 주류일 수 없음을 절감하면서,
가끔 저 문장이 생각난다. "억압받는 자의 입장이 가장 혁명적이다."

4.
예전에 ㄹ, ㅎㅃ이랑 세미나 할 때,
내 논문의 인터뷰이들이 가진 공통점을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어떻게 그 시절을 살면서, 그렇게 천하태평일 수가 있었을까!
심지어 그들은 대학 취학률이 그렇게 낮았는지도 몰랐다니까!"
같은 시대 공장을 다녔던 여자들의 수기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한국 사회의 비민주성과 노동계급의 현실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비젼이 행간에 녹아있다.

5.
오늘 수업에서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여성) 샌드라 선생님은
자신이 연구비를 따기 위해 내야했던 서류들 하나하나를 보여주면서 
대학을 지배하는 경쟁적, 효율주의적, 반학문적 경향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무려 40여분간!

6.
소위 '3세계'에서 온 나에게 북미 한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변화는
내가 다니고 있는 대학의 영어 찬양, 실적 중심, 유학 대세 경향과 연결되어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그 속의, 영어도 실적도 미국 유학 경험도 없는 여자 대학원생들의 현실이 떠오른다.
그러나 샌드라 선생님에게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는 북미의 문제일 뿐이고,
어쩌면 그것이 자신의 세계의 전부일 것이다.

7.
시야, 내 눈에 보이는 세계의 범위는 내가 어디에 위치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일 수록 현상을 읽어내는 깊이가 더해진다.
내 피부로 느끼는 나의 문제가 '보다 나은' 세계에서는 이런 현상으로 나타나는구나,
세계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구나, 하고 해석할 수 있다.
억압받는 이들의 입장에서 본 세계는 더 입체적이고 더 복잡하고 더 역동적이다.
이것이 세계의 실제 모습에 더 가깝다. 그래서
"억압받는 자들의 입장이 가장 혁명적"이고, 그들의 시야가 가장 넓다.

8.
북미의 한 도시에 있는 지금, 동아시아 출신 가난한 여성인 나는 비주류에 속하지만
돌아가 한국 사회 맥락에서 나는 많이 배우고 결혼도 했고 그럭저럭 먹고 사는 여자다.
세계를 보는 내 시야가 얼마나 넓고도/좁은지, 생각하면, 아찔하다, 두렵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다행이다.
어떻게 하면 더 혁명적이고 급진적으로 세계를 읽어낼 수 있을까, 하는 게
나의 직업적인 고민이라는 사실이.


오늘은, 아침기도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