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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자신이 놓여 있는 어떤 문화권의 (이족) 결혼에 대해 안다고 가정해 보자. 즉, 아버지의 보호로부터 남편의 보호로 넘어가는 회로를 영구화할 여자들과 남자들을 생산하기 위해 자신 아버지의 보호로부터 남편의 보호로 넘어가며, 최종적으로는 아들의 보호로 넘어간다고 말이다. 이러한 앎의 견지에서 보자면, 그 여자는 "결혼의 안정성"을 보전할 수 있고 섹시하지 않고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 다른 한편, 이족 결혼이 여자 안에 있는 다양한 종류의 상호적 창조적 정서적 잠재성을 성취하는 것으로 알려진다고 가정해보자. 그러한 앎의 견지에서 보면, 그 여자가 개인적으로 의도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성취가 좌절된다고 느낀다면 다른 곳에서 성취를 추구할 수 있다. 두 가지 상황 모두 생산적이다. 하나는 결혼의 안정성을, 다른 하나는 여자에게서 지각되는 성취의 자유를 생산한다. 물론 두 상황 모두에 수반되는 고통도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과 별도로 이 여자들이 자기들의 삶을 성취하게 하는, 때로 명백한 전술 수준 아래에서 기입되는 저항의 터미널들이 있다. (중략) 역능/앎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두 상황이 안고 있는 자기억압 요소들을 가시화할 수 있다. 한편에서는 여성의 자유라는,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의 파종에서 특별한 역할을 할 여성의 권리라는 "분과학문" 수단(예컨대 <문화연구> 집단을 구성하는 <여성학>)을 통해서라도 말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된다. 여자들의 삶의 자료인 일상의 역능/앎이라는 수수한 전술은 드레스 코드와 노동 습관, 죄의식과 죄의 여행이 지닌 통제성으로 유도할 뿐만 아니라 권력/지식의 커다란 집합적 장치들이라는 윤곽으로 유도한다. 이 장치들이야말로 가족을 억압적 이슈로, 아이 돌보기를 알리바이로, 재생산 권리들을 총선과 정책의 도덕적 멜로드라마로 전개한다.

- 스피박,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 2장 권력/지식에 붙이는 논의, pp.75~76




이 구절을 읽으며 발견하는 것은, 
내게 다음과 같은 생각의 틀이 있다는 것:
- 생산 vs 자기억압, 이라는 이항대립, 
- 지배 장치들의 윤곽을 드러내는 (그리하여 저항으로 '나아가는')앎 vs 지배 장치 자체를 살아내는 전략으로서의 앎, 이라는 이분법

자기억압의 요소들을 드러내는 것이 여성의 자유 혹은 여성의 모성 권리 확보로 귀결되고,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앎이 국가와 제도권에 의해 공인된 가족, 육아, 재생산 권리의 시나리오로 유도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 이 회로를 꿰뚫어보는 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