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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알렉스네 집은 반지하에요. 그래서 아침 볕이 잘 안들어옵니다. 맑은 날에도 그렇고, 오늘처럼 흐린 날엔 더욱 그렇고요. 어젠 피곤한 몸으로 자정 쯤 잠자리에 누웠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오전 열시가 훌쩍 넘었어요. 간만에 열시간을 내리 자고 일어나니 조금 가뿐합니다. 반지하 방에서만 가능한 숙면을 간밤에 누릴 수 있었네요, 기분이 좋아요. 

알렉스와 함께 사는 네이튼은 종일 집에서 일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네이튼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커피콩을 갈아서 메이커에 넣고 커피를 내리는 거예요. 신선한 커피향이 부엌과 거실에 퍼지고 있을 즈음, 네이튼이 "커피 한 잔 마실래?"라고 수줍으면서도 친절한 대사를 한 마디 합니다. 지금 바로 그 커피를 마시며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음, 커피 맛 참 좋으네요. 

알렉스는 만난 지 십년 쯤 된 친구입니다. 둘 다 이십대일 때, 세미나와 인생 상담, 흡연과 음주 및 가두 집회, 저질 싸구려 쇼핑과 각종 학내 정치 모임을 공유했던 사이입니다. 오년 전, 알렉스가 훌쩍 한국을 떠나버릴 때, 벤쿠버에서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될지 상상하지 못했어요. 십년 전, 알렉스와 처음 만나서 친구가 되기 시작했을 때, 그가 이 먼 나라에 와서 이렇게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살게 될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처럼요. 이국 땅에 오래된 친구가 살고 있으니 좋군요. 알렉스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나는 그와의 오래된 인연이 고맙습니다, 조금씩 그 오래된 인연을 들여다보고, 우리가 겪을 내일도 미리 내다보곤 합니다. 천천히 한 발짝 씩 더 친해지고 있는 새 친구마냥, 정겹고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오늘 아침에 메일함을 열어보니, 알렉스보다 더 오래된 한 친구의 편지가 와있었어요. ㅈㄹ학원에서 재수하던 시절, the 찌질est days in my life를 공유했던 ㅎㅇ의 편지. 반가움과 어색함이 묻어있는 몇 줄의 편지가 십오년 전의 나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편지를 받자마자 금새 써내려간 내 답장을 받아보는 ㅎㅇ 또한 행간에 묻은 어떤 느낌들을 읽어낼 수 있으려나, 하고 잠깐 생각해 봅니다. 

벤쿠버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어요. 여기 와서 지낸 6일 간 일기예보가 맞았던 적이 하루도 없었어요. 오늘은 아주 흐립니다. 흐려도 일요일이라 그런지 골목길엔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려요. 아침 먹은 그릇 설거지를 마치고 나면 느린 걸음으로 집을 나서서 도서관에 가볼까 해요. 무수한 책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한참 동안 책상 앞에 앉아있는 일, 이런 걸 하면서 간만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기분을 만끽해볼까 합니다. 지금 한국은 일요일과 월요일 사이의 한밤 중이겠네요. 모두들 좋은 꿈 꾸시길, 먼 곳에서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