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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각대장이었다. 중삼 때 담임이었던 할머니 가사 선생님은 지각하면 일교시 시작 전까지 교실 뒷문 옆에다 벌서기를 시켰는데 거의 매번 그 자리를 지켰던 기억이 있다.ㅋ 대학교 때도, 단체 일 할 때도, 대학원 다닐 때도 지각을 자주 했다. 친구들이랑 만날 땐 말할 것도 없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만날 때도 잘 늦었고, 가끔이긴 히지만 강의 시각에 늦어서 땀 뻘뻘 흘렸던 적도 몇 번 있다.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아차 늦었구나 싶을 때의 마음은 참 괴롭다. 내가 늦어 상대방이 화가 나면 어쩌나 두렵기도 하고 약속이 깨지거나 모임 자체가 소용없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한다.

토론토에서 지냈던 몇 개월 간은 거의 지각을 안했다. 가장 큰 이유는 낯선 동네에서 길눈도 어두운 내가 자칫 잘못하면 엄청 늦을 수 있겠다 싶어, 될 수 있으면 집을 일찍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동안에는 핸드폰 통화도 문자도 불가능해서 약속 장소로 가는 길에 지각을 양해받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약속은 이메일을 통해 정했기 때문에 예고없이 늦게 가면 만남 자체가 불안정해지기도 했고. 다행스러운 건 지각 안하려고 애쓰는 습관이 서울에 돌아와서도 유효하다는 것. 그래서 최근에는 대부분의 경우 내가 먼저 약속 장소에 나가있는다. 그렇게 하다보니 이전에 몰랐던 걸 알게 된다.

제일 먼저 알아차린 건,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상대방에게서, 늦을지도 모르겠다는 문자가 오면, 좀 짜증이 나는구나, 하는 거. 그 다음은, 상대방이 딱 정해진 시각에 나를 만나러 나와주면 그 사람에 대한 믿음과 좋은 감정이 생긴다는 거. 이거 가만 보면 당연한 사실인데 예전엔 잘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대부분 먼저 와서 기다리는 쪽이 아니라 지각하는 입장에 있었으니까. 흐흐.

어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는데, 약속했던 바로 그 시각에 상대방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좀 늦을 것 같다는. 거리는 더웠고 몸은 좀 안좋았고 낯선 사람 만나는 자리라 마음이 별로 편치 않았는데 그 문자를 받으니 화가 화르륵 올라오더군. 게다가 그 자리는 상대방이 청했던 만남이라 나는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주는 쪽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20여분 지나서야 상대방이 왔고, 늦어서 미안하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고 웃더라. 그 후엔 화기애애하게 대화가 오갔는데, 점심 먹고 헤어져 저녁이 됐는데도 내게는 그 화나는 마음이 가라앉지가 않았다. 화를 부글거리며 돌이켜보니, 내가 지각을 일삼아했던 그 수많은 약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의 가슴에 이렇게 짜증과 화를 얹었을까 싶다. 그러면서 진심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워졌다.

약속컨대, 이제 지각대장의 역사는 여기서 그만.
그리고 이제 남은 건 지각대장들에게 당해주는 것?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