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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에걸리지않는/황홀한일상

여름날2

새빨간꿈 2010. 9. 2. 11:59


1.
연구실을 옮겼다.
이제 논문 집필만 하면되는, 학위 과정의 끄트머리에 있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방으로. 
이 방 이름이 원지재(遠志齋)다, 큰 뜻을 가진 사람들이 머물러 공부하는 곳.
이름 덕인지 분위기가 학구적인데다 남향이라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밝아서 좋다.

2.
번개불에 콩 볶아먹듯 열아홉페이지 짜리 글 하나를 뚝딱! 썼다, 지난 나흘간.
생짜로 한 편을 다 쓴 건 아니고, 여기저기 써두었던 단상들과 독서 노트를 정리해서.
마음 바쁘게 원고 쓰면서 느낀 건, 역시 글이라는 건 평소 사유의 깊이와 넓이만큼만 담아내는구나.
매일매일의 읽기와 생각하기와 쓰기와 기록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덕분에 뼈저리게 깨달음.

3.
인터넷으로 주문한 슈즈가 안와서 맨발로 두시간 스트레이트 첫 발레 수업에 참여.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발꼬락 마디마디까지 아프더군...흐흐
스트레칭부터 완전 뻣뻣 몸치인데다 한손으로 바를 붙잡고 음악에 맞춰하는 동작들은 왤케 헷갈리는지.
근데도 이상한 건 발레 이거이거 재밌다...ㅋ 강사 샘도 수강생들도 너무 열심들이라 벌써부터 긴장이 팽팽.

4. 
다닥다닥 연립주택들이 붙어있는 우리 골목이 그나마 빛났던 건, 모퉁이 집의 능소화 덕분이었다.
풍성하게 자라난 가지들 끝으로 초여름부터 늦여름까지 대롱대롱 주황색 농염한 그 꽃이 쉬지 않고 폈는데.
그저께 새벽에 몰아친 태풍이 그 꽃들을 우수수 다 떨어트렸다, 아직 질 때가 안되어 떨어진 꽃들.
이렇게 꽃은 지고, 여름은 간다. 늦여름이 제법 오래 갈 거라 해도, 볕의 색깔이 이미 달라져있는 걸.

5.
진지하면서고 무겁지 않고 유머러스하지만 냉소적이지 않는 것, 이게 시대를 거스르는 에너지가 아닐까.
절망과 야만의 시대,라 오늘-여기를 규정하고 싶지 않다, 내 삶을 비극적으로 보고싶지 않은 것처럼.
오래오래 쉽게 꺾어지 않으며 싸우고 사는 법은 가볍고 재미있게 공부하는 법과 연결돼있을 것 같은데.
학교 순환도로 바닥에 누군가 이렇게↓ 써놨더라. "용쓰지 마라, 다 재미로 하는 거란다" 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