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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밤엔 간만에 늦게까지 깨어있었어요. 자정 쯤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잘안되더라구요. 한참 뒤척이다 벌떡 일어나 작은방에 책 들고 가서 좀 읽었어요. <더 리더> 영문판을 좀 보다가, 간만에 박완서가 읽고싶어져서 <그 남자네 집>을 다시 봤습니다. '시'와 '사치'로 전쟁을 견디고, 서로에 대한 몰두의 힘으로 궁벽을 견뎠던 젊은 연인의 시간들. 오십년이나 지난 뒤 그걸 다시 돌아보는 노인의 시선이 서늘하고도 뜨거웠어요. 박완서 특유의 냉정한 성찰의 말들은 읽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더군요. 그래도 사랑이야기라 그런지 마음이 노골노골해져서, 이내 긴장이 풀리고 졸음도 밀려왔답니다.

2. 어제 저녁엔 용산참사 2주기 추모 문화제에 갔어요. 서울역 광장에 모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날씨는 무지 추웠습니다. 참사가 일어나던 당시, 나에게 용산은 먼 나라 이야기 같았어요. 엄마가 떠나시고 처음 맞은 겨울, 그 때 나에게 세상 일은 방음벽을 사이에 두고 들리는 웅얼거림으로만 다가왔어요. 뉴스에서 화염 속 철거민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나는 또 나만의 슬픔에 갇히곤 했던 그 며칠을 기억합니다. 한 번도 용산 현장에 가보지 않았고 인터넷으로도 뭔가를 찾아보지 않았어요. 그러다 지난 가을에서야 <여기, 사람이 있다>를 보았고, 미뤄두었던 여러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걸 경험했어요. 그 후로 용산참사는 내게 부채감을 주는 일이 되었습니다. 어제 저녁, 그 때문인지 조금 울었는데,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무거운 채로 남아있어요.

3. 요즘, 논문 작업이 잘 안됩니다. 책상 앞에 진득하니 붙어있지 못하는 마음 상태도 있고, 이런 저런 일들도 있고, 그러네요. 그러면서 초조함은 매일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는 초조함 사이로, 참 모순되게도, 쌓여있는 논문 자료들과 파일들, 분석을 기다리는 데이터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는 마음도 고개를 들고요. 하기 싫은 일을 피하는 어린 아이 심정으로, 논문이 아닌 다른 일을 찾고 거기로 도망가고 그러고 있어요.

4. 아고, 이거 잘 자라겠나 싶어서 걱정을 많이 했던 화초에서 기다란 꽃대가 나왔어요. 오늘 아침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니, 연두빛 가늘고 여린, 그렇지만 생명력이 느껴질 정도로 쭉 뻗은 그 꽃대 위에 꽃망울이 대여섯개 잡혀있더라구요. 해준 거라고는 햇볕 잘드는 창가에 두고 칠일에 한번씩 물을 준 것 밖에 없는데 이렇게 혼자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니. 너무 대견해서 칭찬의 미소를 백개쯤 보내줬는데 내 마음을 알아들었을라나 몰라요. 잠시 우리집에 머물고 있는 애가 옆에서 신기한 표정으로 말했어요, "언니는 그런 걸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구나!"  이런 종류의 기쁨을 또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대견하고 흐뭇하고 자랑스럽고 고마운 이 기분을요.

5. 금요일 저녁이네요. 연구실 사람들도 일찍들 귀가를 하고요, 나도 오늘은 '핫'한 저녁 약속이 있어요. 이번 학기 수업들은 친구들과 뒤풀이 자리. 학생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클 수록 사적인 자리에서 불편해하는 내 모습을 최근 발견했어요. 잘보이려고 하니까 뭐든 어색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오늘은 잘 '보이려는' 마음보다는 학생들을 잘 '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약속장소에 갑니다. 기대가 좀 되네요. 주말이 좀 덜 추워서 다행이에요. 모두에게 따뜻한 주말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