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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이번 학기 수업을 들었던 한 학생이 나의 성장과정이 궁금하다며 이야기해달라고 했을 때,
내가 별 머뭇거림 없이, 그리고 별 감정의 동요없이, 어린시절 여자아이로서 차별받은 경험과 가난의 상처들과
엄마의 교육열을 술술술술 얘기하는 걸 보고, 좀 놀랐다. 예전엔 어린 시절의 어떤 것들을 떠올리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고 우울하고 슬펐는데.

십년 전, 어떤 글에서 나의 성장과정과 대학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제법 구체적으로 써본 적이 있고,
학생들 앞에서 몇 번 내가 왜 이런 저런 것들에 관심을 두고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나의 어린시절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의 대상이 아닌 사회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된 것 같다.
나라는 인간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분석의 결과물로서 성장과정과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들.

문득, 감정이 잘 지워진 혹은 잘 정리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내가 좀 낯설어졌다. 그냥 놀라운 게 아니라, 낯선.
어떤 서사를 반복하여 연행하면, 그 이야기는 전형성을 띠게 된다. 그리고 켜켜이 쌓여있던 감정들은 휘발된다.
어쩌면 그것이 치유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객관화와 관찰을 통한, 나와의 거리 거리두기.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 감정들의 복잡다양한 층위들이 어디로 어떻게 휘발되고 숨어버렸나, 찾아헤매게 된다.
어쩌면, 언제나 서사를 피하고 설명을, 감정표현을 피하고 판단과 주장 전개를 해왔던 나에겐,
감정을 통제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어떤 이야기들 자꾸 해내는 것, 그게 지금 더 필요한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