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모토 바나나, <하드보일드 하드럭>

설거지 투어의 와중, 틈틈히  읽었다. 
hard-boiled한 내 삶에 온 hard luck.
손으론 수세미로 그릇을 닦고 머리론 이 책의 구절들과 내 논문의 어떤 구절들을 번갈아 생각했다.
정신적인 것들이 때로 지금-여기의 물질적인 팍팍함에서부터 나를 구해내는구나.

새로운 사람을 좋아할 수 있게 됐다는 건,
한번 뿐인 그 가을이 이미 지나가버렸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바나나의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 길모퉁이의 아름다운 음악처럼,
이렇게 종종 맞딱뜨리게 되는 건 우연인지, 뭔지.

"사카이씨, 애인 있어요?"
나는 물었다.
"지금은 딱히. 친구 정도는 있지만."
그는 말했다.
"언젠가 또 이렇게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말했다.
"만날 수 있겠지, 그리 오래지 않아서."
"지금은 시기가 안 좋아서 잘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사귀자고 하면, 내가 놀랄 거야."
"참, 장례식 때 동생 분하고 얘기 많이 나눴어요."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요, 내내 울기만 하더라고요."
"저 말이지, 경험한 적도 없는 일을, 다 아는 척
얘기 하는 거 무지 싫어하니까,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미안해. 나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어.
하지만 이런 형태는 아니었고, 부모가 된 적도 없으니까,
동생은 물론 누구에 대해 생각해도 잘 파악이 되지 않아.
쿠니 씨도 마찬가지야. 당신 역시도. 잘은 모르겠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일단 내 눈과 내 귀로 보고 
들은 것, 느낀 것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아. 그런데 정작 입으로는
나오지가 않아."
정색하고 그가 말했다.
"이런 일은 경험한 사람 쪽이 더 적어요."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친절하게 대해 주고 있다는 건 알아요."
밖으로 나오자, 별이 빛나는 겨울 하늘이 있었다.
"옛날에 읽은 어떤 책 속에, 길모퉁이에서 아주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면, 죽을 때에도 그 음악이 흐른다는 내용이 있었어.
주인공이 어느 화창한 오후에 길을 걷고 있는데 건너편 레코드
가게에서 이루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와서
그는 앉아서 그 음악을 들었어. 그의 정신적인 스승은, 
인간 생활의 어떤 측면에든 죽음이 현재한다는 증거라고,
그의 운명이 그에게 보여준 증거라 말하지. 그가 세상을 떠날 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 트럼펫 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주지."
그가 말했다.(126-127)

...그래, 그 노래처럼,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한 번뿐인 올가을은,
오늘밤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빠져나가, 저 멀리로 떠나가
버릴 것이다. 그리고 아직 보지 못한 겨울이 힘차게,
잔혹하게 찾아오는 것이다.(134-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