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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5일 화요일

솔직히, 토론식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에 좀 자부심이 있었다. 근데 오늘 수업을 해보니, 그동안 진행했던 수업들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되도록 토론의 조직자(facilitator) 역할에 충실해보자 마음 먹은 이번 학기, 오늘은 그 시도의 첫 날. 동그랗게 둘러앉아 세미나식으로, 수업의 대부분을 학생들의 이야기로 채워가는 건 여러가지 면에서 도전이었다. 교실의 침묵에 대한 어색함을 포함하여 선생이 이렇게 듣고만 있어도 되나 하는 의구심, 무엇보다 학생들의 이야기만으로 충실한 수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학생들과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았음에도 자꾸 내 의자가 특히 더 낮은 게 아닌가 느꼈다는 거다. 아, 강단에 서서 학생들의 주목을 받으며 이야기하는 것에 엄청 익숙해져 있구나. 시선을 주고받는 높이에 관한 습관이 어느새 굳어진 거다, 단 6년의 비정규직 선생 노릇만으로도.

오늘 수업의 타이틀은 '서울대 바깥의 학생들과 나와 교육학.' 처음 나눈 이야기는 서울대학교라는 시공간 바깥의 20대 또래들의 현실에 대한 학생들의 '앎'에 관한 것이었다. <4천원 인생>과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읽는 과정에서 각자 어떤 '앎'의 경험을 했냐는 질문에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런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아닌 내국인들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에서부터 그에 대한 죄책감과 무력감에 관한 이야기, 솔직히 그들의 현실이 와닿지 않는다는 이야기,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쓴 에세이 내용이 더 충격적이라는 이야기까지. 다들 격앙되지 않은 목소리로 나눈 이야기들이지만, 각자의 입장과 시선과 관점의 차이들이 읽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교실을 끌고가는 주류의 목소리와 그렇지 않은 목소리들이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하고.

수업 후반부엔 서울대생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전에도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발견한 사실은, 선망의 대상인 서울대 학생으로 사는 일은 긍정적인 경험만은 아니라는 것. 교환학생, 동아리활동, 학점관리, 봉사활동이라는 '무언가 의미있는 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자신을 '잉여'로 칭하는 JHEE는 서울대생의 열등감을 이야기했다. 촛불집회를 열심히 다녔지만, 결국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걸 체험한 SW은 냉소와 분노가 적절히 섞이는 상태를 유지해야한다 역설했고, JOOH는 이기는 싸움을 해본 적 없는 학생운동 경험을 내어놓았다. 서울대생이야말로 이 사회의 리더가 될 사람들 아니냐는 KH의 말에 "리더는 리더의 아들들이 하는 것"이라 받아친 SW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딸도 아니고 아들이라니 더욱!) 자신들의 삶과 스스로 속한 사회에 관한 학생들의 이야기에서 좀처럼 희망의 언어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니 이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안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겠다. 뭔가를 알았을 때 추동되는 실천의 의지는 전망이 없는 시대에 상처로 돌아오기 쉬울테니까. 그러니 어떤 현실에 대한 앎의 경험을 자기 존재와 연결시키는 것도 무모한 일이 되어버리는 것 아닐까.

수업 시간에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어쩌면 우리가 찾는 희망이 너무 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폐지된 피자 30분 배달제(http://cafe.daum.net/alabor/4gch/359) 사례나 홍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승계와 같은 일들은 희망의 증거가 우리 주변에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모든 싸움이 이기는 건 아니지만,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을 너무 하찮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업 말미 내가 던진 질문은 이런 거였다: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는 서울대 바깥의 20대들의 삶과 특권과 열등감 사이를 사는 서울대생들의 삶 간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어쩌면 이 둘 간의 관계를 모색하는 가운데 희망의 증거를 찾을 수 있을지도.) 토론 중 DY는 이것보다 더 멋진 질문을 던졌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순응하고 사는 것일까? 이 질문들이 앞으로의 우리 수업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 줄 것 같다.

불안감과 어색함 속에서 수업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나도 모르게 학생들의 이야기 하나 하나에 귀기울이게 된다. 어느새 내 노트에 빛나는 문장들과 보물같은 단어들이 기록되고. 학생들의 생각과 말을 믿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것. 앞으로 내가 열심히 연습해야할 일이다. 어떻든, 첫 발걸음을 떼고 나니 훨씬 마음이 가볍다, 살짝, 다음 시간 수업이 기다려질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