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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박사 일기

정리의 시간

새빨간꿈 2012. 2. 22. 16:07

이상하게도 정리벽이 발동하는 시기가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내 물건들 중에서도 특히 옷과 책을 제대로 정리해야되겠다고 마음 먹게 되는 것 같다.

정리벽 덕분에, 요며칠 옷과 책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면서 물건들에 묻혀있는 과거의 어떤 순간들과 만나고있고,
이 물건들이 가깝고 먼 미래에 어떤 소용이 있으려나 가늠하고 있는 중이다.

옷은 의외로 하루 저녁만에 정리 완료.
요전에 안입는 옷을 추려서 두 박스나 아름다운 가게에 보냈는데,
그제 다시 입지 않을 옷 한 박스가 생겼다.
오랫동안, 언젠가는 입을테다, 라며 붙들고 있었던 옷들이
날개를 달고 다른 시공간으로 가게 되는 걸 생각하면,
정리되는 옷 무게만큼 가벼워지는 것 같다.
그래도 가끔은 그 옷들이 아쉬워지는 순간들이 오겠지만.

책과 서류 정리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다.
펼쳐보지도 않고 책장에 쌓아두기만 했던 책들을 보니 먼지처럼 한숨이 폴폴.
그것들도 모아서 중고서점에 팔아버릴 작정이다.
학회나 세미나에서 받아온 자료집과 서류들도 많이 버렸고,
작년 이맘때쯤 대구집에서 챙겨온 내 오래된 책들, 두어번 이상 씩 봤기 때문에
내 손때가 절절히 묻은 그것들도 반 이상은 버렸다.
일기장과 편지, 문집, 상장들은 플라스틱 상자에 담아두기로 했다.
쓸데없지만 절대 버릴 수 없는 것들, 이라고 머릿 속에서 라벨링된 물건들.
이건 나의 역사의 일부야, 라고 선별하고 정리하는 동안,
짧은 삶이 나름 편집되고 있는 것 같다.

일기장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대학입시를 쳤던 날의 일기를 봤다.
첫 해에 낙방하고 다시 도전해서 시험을 치뤘던 스무살의 나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양, 드디어 &&대 시험을 두 번이나 보다. 결과는 아직 안나왔지만,
어쨌든 오늘, 시험은 끝났다."

영화에서처럼, 시간이 휙 지나 삼십대 중반의 나는
이제 기나긴 학창시절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
졸업식 다음 날도, 내 일상은 여전히 별 변화없이 흘러가겠지만,
어쩐지 스무살의 그 일기 속 나처럼,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제, 삶의 한 마디가 끝났다" 라고
매일 스스로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