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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문득, 2010년 봄, 이십여일쯤, 벤쿠버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시장에 가서 연어와 아스파라거스, 새우를 사와서 오븐에 굽고, 싼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먹었던 소박한 저녁 시간. 저녁을 먹고 나면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가 한 두 편씩 보던 영화들. 늦은 아침을 먹고 천천히 시작하던 하루하루들. 때로 하릴 없이 보내던 오후 시간 그리고 종종 거닐었던 그 한가롭던 길들.

나름 바빴던 7개월의 토론토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 막간과도 같았던 벤쿠버에서의 시간은, 지금 서울에서 보내고 있는 이 시간들과는 완전히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구나. 

기억해보니, 그 때의 나는 어디에서 살든 내가 원하는 속도로, 원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동안 논문과 돈버는 일, 가족과 친구들의 관계 망 속에서 주어진 일들을 처리해가며 살다보니, 그 때 내가 이런 마음가짐을 가졌던 것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늘 간만에 블로그 예전 글들을 읽으니, 지금 서울에서의 일상이 새롭게 보인다. 여기의 나는 무엇을 중심에 두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새삼 돌이켜보는 토요일 낮.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즈음 블로그에 올렸던 글(http://redream.tistory.com/432)을 보니, 몇 가지 일상의 원칙들은 제법 지키며 살고 있구나.

- 동물의 가죽, 털로 만든 옷, 신발, 가방은 사지 않기: 특히 신발 살 때, 가죽을 사지 않으니, 신발 구입 예산이 줄어들어서 좋음. 물론, 이쁜 디자인은 대부분 가죽 제품이고, 이런 것들은 비싼 대신 오래 신을 수 있음. 그래도 가죽 신발을 피해서 사다보니, 일종의 노하우가 생겼달까. 합성가죽이나 패브릭으로 만든 신발 중에서도 오래 신을 수 있는 제품은 어떤 건지 좀 알게됐고, 신발을 산 직후 수선집에 가져가 고무 밑창 등을 덧대는 스킬도 생겼음.

- 화장지, 일회용 생리대, 일회용 물건들 사지 않고 쓰지 않기: 손수건, 뒷물 수건, 면생리대 쓰기가 습관화되었음. 집에 오는 손님들을 위해 화장지를 비치해두기는 하지만, 우리집은 화장지-free house.ㅋ 까페나 식당 같은 데서 가끔 티슈를 쓰긴 하는데, 손수건을 들고다니니 비교적 덜 쓰게 되는 경향이 있음. 그리고 장바구니와 내 컵은 늘 들고다니고 있음. 그치만 비닐 봉지를 들고 다니지 않고 있어서 장바구니에 바로 담을 수 없는 것들은 종종 비닐 봉지에 담아오기도 하는 듯. 자꾸만 쌓여가는 비닐 봉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고민 중.

- 바케스에 물 담아서 쓰기, 아크릴 수세미로 설거지 하기: 바케스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새 물을 받아 세수, 손빨래 등을 하고 나머지 하나는 헹구고 남은 맑은 물을 모아둔다. 바케스에 물을 받아쓰니, 수도꼭지에서 바로 바닥으로 줄줄 흐르는 물이 없어져서 좋고, 재활용 물로는 욕실 바닥 청소나 변기 청소에 쓰고 있음. 그치만, 샤워는 여전히 샤워기 틀어놓고 콸콸콸. 여름철엔 받아놓은 물로도 샤워를 하곤 하는데, 추운 날씨엔 얼른 뜨거운 물 몸으로 받고싶어서... 아크릴 수세미 설거지는 꾸준히 하고 있지만, 합성 세제 사용은 여전히 하고 있음. 다만 EM 용액을 섞어서 쓰긴 하지만.

 

... 공부 시간에 관한 건, 계획했던 대로 잘 안된다. 논문 쓰는 기간엔 워낙 스트레스 받으며 논문논문논문 했던 것 같고, 그 이후엔 놀자놀자놀자 이러면서 공부와는 담쌓고 지내왔던 것 같고.ㅋ 지금 원하는 걸 써보자면,

- 강의가 없는 날의 오전 시간은 자유롭게 이 책 저 책 보고 메모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려보는 시간으로 갖고 싶다.

- 진짜진짜 잘안되는, 규칙적인 영어 공부와 규칙적인 읽기도 실천해보고 싶고.

 

... 남들한텐 잔소리 잘하지만 나 스스로는 잘 안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운동과 기도.

- 매일 한 시간 걷거나 운동하거나,

- 매일 아침 기도.

이것들도 습관처럼 한 번, 만들어보고 싶다.

 

삶의 기준이 있으면 헷갈릴 일이 없다는데, 가끔 혼란스럽고 멍해지는 걸 보면, 아직도 내 삶엔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것 같다. 더구나 졸업을 하고 반백수 신분으로 살다보니,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에 부딪히는가에 따라 쉽게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치만, 내가 만든, 크고 작은 일상의 규칙들이 어느 방향을 보고 있는지는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듯. 그리고 삶의 속도를 애써서 좀 낮추는 것도 이 일상의 작은 규칙들이 만들어가는 힘일 거다, 아마.

오늘 이렇게 포스팅까지 하고 나니깐, 왠지 생활계획표 다시 짠 것 같은 기분.^-^ 그러고보니, 졸업한지 한 달이 넘었네. 새봄 새백수의 하루도 이렇게 가고 있으니, 새 생활계획표 적용은 내일부터?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