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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유월에 '정책연구에서의 질적연구방법론' 특강을 하셨던 김정원 선생님 강연 내용을 오늘에서야 정리했다. 노트에 필기해놓은 것을 이제사 펴 놓고 그 때의 느낌과 생각들을 더듬어본다. 어젯밤에 아기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며 생각했었다. 김정원 선생님 강연 중 제일 좋았던 것은 "질적 연구는 연구자 자신이 성장하는 과정이다"라는 말씀이라고. 만약 선생님께서 "질적 연구를 통해 학교 현장의 문제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며..." 라는 식으로 말씀 하셨다면 별 감흥이 없었을 거 같다. 누군가를 도와주기 위해서 연구한다는 것은 참 그럴 듯해보이면서도 위험한 일인 것 같다. 도움을 주는 위치라는 게 얼마나 달콤하고 자기 위안적인가. 그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늘 깨어있어야지, 하면서도 자주 걸려 넘어지곤 한다. 그래서 지금 나는 "공고에 도움 주는 연구를 하고 싶다"는 내 욕망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어쩌면 거기에서 연구자로서의 생생한 삶이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학생 역량과 관련하여 어제 진행했던 교사 집단 면담에서 한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교사들은 역량이니 뭐니 이런 걸 명시적으로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역량들을 길러줘야 한다는 것을 다- 압니다. 역량이라는 개념이 나오기 전에 이미 교사들은 이런 역량을 길러주기 위해 교과 안밖에서 노력해오고 있습니다." 나는 사실 그 때 피곤한 몸으로 면담 내용에 집중하기 위해 애를 쓴 때문인지 두통으로 지끈거렸는데, 이 선생님의 요 문장들을 듣고는 머리를 한 대 띵-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대부분의 정책 연구와 정책들은 어쩌면, '교사와 학생들은 뭘 잘 모른다. 그러니 이런 새로운 기획과 혁신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논리적으로는 교사들을 교육 개혁의 주체로 보면서도, 그들을 계몽과 교육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은 아닐까. 이미 그들은 알고 있고 행하고 있다. 그 앎과 행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으로부터 교육 연구가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 보면 밑도 끝도 없는, 그러나 나에겐 너무 신선한 이 질문들을 던지면서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 두통을 끌어안고) 간만에 스피박의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를 찾아봤다.
한 여자가 자신이 놓여 있는 어떤 문화권의 (이족) 결혼에 대해 안다고 가정해 보자. 즉, 아버지의 보호로부터 남편의 보호로 넘어가는 회로를 영구화할 여자들과 남자들을 생산하기 위해 자신 아버지의 보호로부터 남편의 보호로 넘어가며, 최종적으로는 아들의 보호로 넘어간다고 말이다. 이러한 앎의 견지에서 보자면, 그 여자는 "결혼의 안정성"을 보전할 수 있고 섹시하지 않고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 다른 한편, 이족 결혼이 여자 안에 있는 다양한 종류의 상호적 창조적 정서적 잠재성을 성취하는 것으로 알려진다고 가정해보자. 그러한 앎의 견지에서 보면, 그 여자가 개인적으로 의도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성취가 좌절된다고 느낀다면 다른 곳에서 성취를 추구할 수 있다. 두 가지 상황 모두 생산적이다. 하나는 결혼의 안정성을, 다른 하나는 여자에게서 지각되는 성취의 자유를 생산한다. 물론 두 상황 모두에 수반되는 고통도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과 별도로 이 여자들이 자기들의 삶을 성취하게 하는, 때로 명백한 전술 수준 아래에서 기입되는 저항의 터미널들이 있다. (중략) 역능/앎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은 두 상황이 안고 있는 자기억압 요소들을 가시화할 수 있다. 한편에서는 여성의 자유라는,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의 파종에서 특별한 역할을 할 여성의 권리라는 "분과학문" 수단(예컨대 <문화연구> 집단을 구성하는 <여성학>)을 통해서라도 말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된다. 여자들의 삶의 자료인 일상의 역능/앎이라는 수수한 전술은 드레스 코드와 노동 습관, 죄의식과 죄의 여행이 지닌 통제성으로 유도할 뿐만 아니라 권력/지식의 커다란 집합적 장치들이라는 윤곽으로 유도한다. 이 장치들이야말로 가족을 억압적 이슈로, 아이 돌보기를 알리바이로, 재생산 권리들을 총선과 정책의 도덕적 멜로드라마로 전개한다.- 스피박,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 2장 권력/지식에 붙이는 논의, pp.75~76
정신없는 연구 일정 속에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연구자로 살아가는 나의 위치와 내 관점, 입장이 아닐까. 내가 갖고 있는 이분법, 엘리트주의, 교육과 연구에 대한 고정관념들. 스피박은 앎/역능의 견지에서, 여성의 현실에 대해 잘 아는 주체와 그것도 모르면서 결혼을, 자기성취를 하고 있는 대중 여성들의 이분법을 질문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억압과 생산적 과정을 나누는 이분법적 인식에 대해서도 꼬치꼬치 묻는다. 누구나 알고 있는 만큼 행위한다. 행위하는 만큼 알고 있는 거다. 교사와 학생들의 앎을, 그들의 행위를 내 고정관념으로 재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것이 어쩌면 질적 연구의 핵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연구자는 성장할 수 있는 거겠지. 앎의 주체를 연구자에게만 한정하는 권력은 참 달콤하다. 요 달콤함을 직시할 때 성장하는 연구가 가능할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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