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2012-, 박사 일기

[+925] 근황

새빨간꿈 2015. 1. 20. 12:12


1. 휴직한 지 어느새 두달이 훌쩍 지났다. 휴직 후 한달 반쯤은 보고서 마무리로 틈틈히 일을 해야했으니, 실은 새해에 들어오면서 오롯이 전업주부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침에 일어나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반찬 준비를 위해 물을 끓이고 채소를 다듬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거의 종일 아기의 요구와 부름에 응대하고 같이 놀고 씻겨주고 안아주고 재워주는 와중에도 짬짬이 책도 읽고 샤워도 하고 화장도 하고 옷도 차려입고 짧은 외출도 하고 커피도 갈아서 내려마시고 간식도 냠냠 먹는 소소한 생활, 소박한 일상. 반찬 만들기, 청소하기, 빨래하기와 시장보기 등등 조금씩 익숙해지고 재미있어지고 나름의 속도와 일머리를 익히고 있는 중이다.


2. 아기는 쑥쑥 자라고 있다. 며칠 전에 키를 재봤더니 또 훌쩍 자라있다. 평균보다 작은 체구이지만 나름의 속도로 자라고 있으니 믿어달라는 듯, 아기는 내 근심이나 고민들과 관계없이 제 맘껏 자란다. 가끔은 아기의 존재 자체가 위로와 평화를 준다. 내 마음과 머릿속이 복잡한 것과 별개로 세상은 잘만 굴러가고 있으며, 내 삶도 그럭저럭 괜찮다,고 아기가 내게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다.

 

3. 아기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주는 편안함과 별개로 나는 끝없이 세상과 연결되고 싶은 욕구를 갖는다. 내 생각이나 감정을 교류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글을 읽고 싶고 영화를 보고 싶고 세상의 흐름에 내 몸을 담그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전업주부로 살기에 적절하지 않은 인간인지도 모른다. 혹은 전업주부로서 세상에 접속하고 소통하는 법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4. (휴직하고 있는) 나의 일터는 나의 세상 중 하나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내 마음과 생각들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5. 휴직 후 건강이 좋아지는 것 같지는 않다. 여전히 운동을 안하고 결심했던 단식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108배는 한 닷새 했으려나. 그래도 잠은 더 많이 자서 좋다. 할일과 남은 시간을 계산하고 늘 할일에 치여있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잠시 멈춰설 수 있는 요즘의 일상이 더 좋다고 해야할까.

 

6. 아기의 세계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저껜가는 아기 아빠랑 둘이 대화하는 걸 들으니 한국이 어쩌구, 미국이 어쩌구 한다.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다른 사회가 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거 같다. 어제 둘이 동네 도서관에 가서 몽골어로 된 한국 그림책을 봤는데, 엄마가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책은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좀 놀라는 것 같았다. 집에서 동네, 동네에서 고장, 그리고 국가와 지구까지... 아기의 세계가 점점 커지고 깊어져서, 더이상 엄마를 경외의 눈빛으로 보지 않을 때가 생각보다 빨리 올 거라는 느낌이 든다.

 

7. 나는 잘 있습니다. 당신도 잘 있나요. 과거와 미래의 내 당신들에게 인사를 전하는 겨울낮입니다.